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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나를. 당신을.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원하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실제로 바뀐다는 뜻이다. 살았다는 뜻이 영원히 남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라는 문장에서 나도 모르게 최근 보았던 영화 '코코'가 생각났다. 코코와 미구엘 그리고 그 가족들의 삶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사랑, 영원 그리고 우리의 가치들. 이를 철학자 김형석의 방식으로 정리하면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내'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0세 철학자가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요?".
그리고 입을 단짝 거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질문 하나를 더 한다.
"혹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나요?"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엮은 책이 아니다. 이 질문과 질문 뒤에 올 또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화다. 철학자 김형석과 독자 간의 대화일 뿐 이 책에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런데 답이 정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대화의 가치가, 인생의 정답을 기대하는 나에게 현답을 주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다. 철학 에세이이지만 삶의 문제를 난해한 철학 이론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과감한 사회활동을 강권하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살아온 삶을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예단하거나 재단하는 평가를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경험이 인생의 정답인 양 자기 자랑이 대부분인 훈수도 없다. 자기 자신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글로 적었을 뿐이다. 모든 시간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생의 마지막을 염두에 둔 채 기록한 것으로 '우리 삶의 이유'라는 거대하고 오래된 질문과 끊임없이 대화하듯 쓴 책이다. 이 대화에는 가식이나 다른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꾸밈이 없다. 삶과 죽음 앞에 사랑하는 가족을, 가까이한 벗을 잃었던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상실론'.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반추하다 깨달은 가치를 엮은 '인생론'. 영원과 사랑이 닿아 있는 초월적 무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인 '종교론'. 이를 비롯한 여러 수필들을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뒤 그 해석을 더했다. 그래서 난 글을 읽으며, 분명 필요하지만 바쁘거나 어렵다는 핑계로 혹은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고민', '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찬찬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 인생에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안겨주고 싶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보다 더 소중하고 성스러운 가치의 삶은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길이며, 이웃을 위하는 삶인 것이다. 삶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이다.
철학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근사하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공부가 필요한 학문이고, 그러한 철학을 오래 공부한 사람은 같은 단어라도 다른 세계 속에 담긴 양 추론하기 어려운 뜻을 가진 말들이 나열하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살아있는 세계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저 하늘처럼 먼 세상이 철학의 세계 같았고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뜬구름 걷는 거 같았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단어는 낯선 형이상학적 세계 같을 것이다. 난 처음 김형석 교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에세이지만 내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싶은 고민을 하며, 책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난여름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통해 김형석 교수와 책 속의 대화를 나누며 철학자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고민보다 기대를 안고 또 다른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으로 읽었다.
옛날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사랑으로 맺어지는 작은 인연들이 고맙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문장들이 장신구 세공한 듯, 아름다운 걸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에이, 어렵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영역과 다른 영역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이점이 좋았다.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문장.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민과 사색 속에서 피어난 문장이라 이렇게 아름다운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줄임말이나 속어, 거친 표현을 쏙 빼고도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우리에게 편안한 문체도 아니고, 그림이나 삽화, 작은 이모티콘 하나 없지만 흥미롭게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을 부르는 오묘함이 있었다. 글을 읽으며 이렇게 아름답고 품격 있는 표현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낯섦을 어려움이라 생각하지 않고, 에세이를 다 읽어나갔으면 좋겠다. 그 낯섦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알 수 없는 잔잔한 고요함이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는 뜻깊은 시간을 선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듯 다른 감동을 느끼면 참 좋겠다.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빛의 근원이며, 존재의 바탕이다. 나는 하나의 내던져진 존재일지 모른다. 이유도 조건도 없는 하나의 우연한 산물일지 모른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었던 한 우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고, '너'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함께 생각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들과 이별하며 홀로 남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독에 대하여' 부분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깊은 사색의 결과물이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정수였다. "외로움은 일시적이었고 더 큰 즐거움을 위한 기다림으로 바꿀 수 있었다."라고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사귐과 대화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마음 상태를 우리는 고독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고독은 홀로 있는 마음 상태이다."라고 고독을 말한다. 외로움을 느끼기는 쉽지만, 고독을 느끼고 자신이 고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어서 '예술의 아름다운 고독'이라는 부분에 참 공감이 갔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의 아름다운 고독은 감상하는 우리의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고독에의 그리움과 마음의 공허감을 채워주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고독감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는 나도 모르는 높은 미에의 고독감이 가리어져 있었다. 그것을 예술가들이 밝혀주며 전해주었기 때문에 고독에 공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에 대한 그리움. 생경한 표현이지만, 예술가들의 마음은 이러하지 않을까. 기쁨과 행복을 표현한 작품보다 작품 어딘가 쓸쓸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작품과 마주 섰을 때 세상에 오로지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이 가진 힘이다. 저자에게 특히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그랬다. 이곡과 함께 읽는 '고독에 대하여'는 특별했다.
저자는 고독과 나의 감정의 심연에서 시작한 글을 점차 너와 우리로 확장해 나간다. '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며, 그 끝에 '우리'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을 빼놓지 않는다. 나를 깊이 생각하느라 타인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소중하며, 나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라는 공동체성이라는 이야기는 당연하고 익숙하지만 여전히 좋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발견은 자아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즉, 나를 완성하는 것은 내가 우리 속에 어떤 조화를 이루었는냐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책을 통해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누군가와 자신의 철학, 삶의 의미를 나눈다는 것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