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명저기행 - 책으로 읽는 조선의 지성과 교양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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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만 모르는 세계,
명저 (名著) 속으로!

 

 

"독서라는 행위도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일이다. 낯선 길일수록 귀한 친구를 만나는 법이다."

 

名著. '이름난 저서'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저술'이라는 뜻이다. 책 이름 앞에 '명저'란 수식어가 붙은 책을 우린 많이 알고 있다.

 

《목민심서》 《경국대전》 《난중일기》 《연려실기술》 《발해고》 《동사강목》 《열하일기》 《하멜 표류기》 《표해록》 《성호사설》 《택리지》 《북학의》 《동의보감》 《침구경험방》 《동의수세보원》...

 

우리나라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위 책들 이름 가운데 적어도 10개는 눈과 귀에 익을 것이고, 5개 정도는 저자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위 책들 가운데 많은 책들을 들어보았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는 알고 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단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난중일기》는 몇 차례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고, 《열하일기》는 그 안에 <호질>과 <허생전> 정도만 국어 시간에 배웠고, 읽었다.  위 명저 가운데 길이가 가장 짧은 《발해고》는 고등학교 때 읽었지만 좀처럼 그 내용이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조선시대 명저의 딜레마가 있다. 누구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정작 열혈 애독자는 정말 소수뿐인 책이라는 것이 조선 명저의 그림자다. 이름과 저자는 잘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을 통해 책의 가치를 확인한 사람은 소수라는 점. 다시 말해, 명성은 높지만 그 명성에 비해 현대 독자들의 사랑이 적은 아이러니가 《조선 명저 기행》을 완성했다.

 

"필자는 이런 책들이 현대인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우리 역사나 문화 또는 역사 인물에 대한 무관심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책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제는 접근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

 

저자는 명저가 대중에게 멀어진 이유를 "접근의 어려움"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가보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미지의 세계가 주는 낯섦이나 막막함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여행객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서문을 읽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내가 이 훌륭한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책을 손에 들기까지는 쉽지만, 책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 바로 낯섦 때문이었다. 단일 왕조로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유지된 나라였던 조선은 자신만의 색이 분명한 국가였다. 2018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나에게 조선은 다른 나라 만큼이나 낯선 세계가 또 조선이다. 당대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글은 같은 한글이라 읽을 수 있지만, 그 맥락까지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화적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조선 명저 기행》은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다. 마치 낯선 외국에 갈 때 가지고 가는 가이드북과 같이 말이다.

 

*

 



그의 책들 중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것도 많았고, 비록 빛을 본다 하더라도 너무 늦게 세상에 나온 탓에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표출한 개혁 사상과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_ 목민심서 가이드 중에...



《조선 명저 기행》은 명저를 그 책만의 각도에서 바라본다. 정치, 역사, 기행(여행), 실학(과학), 의학이라 분류한 뒤 서술했지만, 《목민심서》와 《경국대전》은 같은 정치서이지만 다르게 다룬다. 《목민심서》는 열여섯 살 때부터 서른 살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 지방관의 삶을 체험하고 스스로도 지방관으로 돌아다녔던 경험이 곳곳에 묻어난 지방행정 총서이고, 《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국가철학을 보여주는 '나라 경영을 위한 대법전'으로 오늘날 헌법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같은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책의 주제도 완성한 작가도 작가가 살아간 시대상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저자는 각 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이드가 되어 설명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행정을 공부한 사람들의 필독서로 손꼽히는 책이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꼭 읽어보길 권면하셨던 책 중 하나였다. 대학에서 행정을 공부했지만, 《목민심서》를 완독한 적은 없다. 한 번은 어떤 책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교수님의 추천을 받고 책부터 집어 들고 읽었다. 결국 재미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며 책을 내려놓았던 기억이 난다. 《목민심서》의 제목에 대해서 목민이란 곧 치민, 즉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고 '심서'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담은 글'이란 걸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수령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사이에서 어떤 치열한 고민을 했는지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또 정약용의 생의 대부분이 녹아진 책이란 걸 알고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글에서 수령이었던 정약용이 향관들에게 당하기도 하고, 또 이들을 잘 통솔하기도 했던 모습을 상기하며 생생하게 읽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목민심서》의 두께에서 읽어야 할 양이 이렇게 많다며 불만을 말하기 보다 이 정도로 세밀하게 말할 정도로 부패했던 조선의 암울한 모습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완성된 연도를 보고, 이 책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늦었단 걸 정약용과 함께 가슴 아파했을 것 같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나라 경영을 위한 대법전'이라는 뜻으로 조선의 성문 헌법이다.

 

《경국대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으며, 사극을 보기 전에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선시대의 직제와 왕실과 관련된 관청에 대해 속속 알아볼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귀에 읽었던 관원들의 직책의 소속이 어떻게 되고, 누가 겸임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하, 통촉하여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왕의 정책에 반대를 하는 신하의 목소리에 힘을 싣게 하는 구조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법전이기에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친근하고 읽기 쉽게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재미있게 보았던 사극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싶었다. 형장에서 처벌받던 죄인들의 재판이 어떤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왕실 친인척은 누가 관리를 하는 것인지 사극 속에서 다 말해주지 않았던 그 당대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전함 위에 앉아 부하들과 함께 생선회를 곁들인 술잔을 기울이며 흥겨워하고, 품을 추며 시를 읊는 부하들의 흥겨운 몸짓만으로도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그저 평화를 사랑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기'라기보다는 '일지'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 《난중일기》에서 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군 이순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아버지 이순신의 슬픔, 아들 이순신의 슬픔, 나이 많고 자신보다 먼저 무과를 급제한 선배를 지휘해야 했던 상관 이순신의 고충에 대해서도 함께 서술한다. 그리고 전쟁 중이란 급박한 상황 중에 기록으로 남긴 난중일기는 《징비록》처럼 임진왜란에 대해 스스로 징계하여 반성하고 후환을 경계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전쟁 중에 조선의 병폐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중한 기록이었다.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옛날의 영주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두 문장으로 된 짧은 내용이지만 《난중일기》를 통틀어 이순신이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거의 유일한 내용이다. 전쟁을 앞둔 장수지만 산야에 핀 꽃과 막 피어오르는 봄풀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마치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한 장면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난 《난중일기》에서 저자가 찾아낸 인간 이순신에 대한 부분들에서 일지가 아닌 일기로 남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용감한 장군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었던 이순신은 산천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적과 맞서 싸운 조선의 명장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다시 기록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바다 위에서 숨을 거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극히 천한 똥 덩어리나 지푸라기일지라도, 밭에 거름으로 주면 아름다운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아름다운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 책도 잘 살펴보는 자가 그런 점을 채택한다면,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성호사설》의 겸손한 서두다. 이익의 말이 지나친 겸손임을 저자는 《성호사설》 가이드로 알려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이익이 겸손하게 말하지 않고, 과감하게 조선에 밝힐 수 있는 생각들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어쩌면, 러시아의 12월 혁명과 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종에게 제사 지내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보다 이를 부끄럽게 바라보는 시선 앞에 당당했던 이익의 생각을 부분 부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가진 태도를 넘어,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글뿐만 아니라 책 전체로 말하고 있었다. 바로 "겸손함"이라는 삶의 태도를 말이다.

 

역사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어느 한쪽의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명저 기행》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역사서는 아니다. 조선 명저를 뜻깊게 읽을 수 있도록 가이드 하기 위해 저자는 종종 자신의 생각을 더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가이드가 자신의 경험을 풀어 설명한 말이 더 기억에 남곤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어머니의 경험과 함께한 《동의보감》 설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한의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연결점이 되었다. 역사서나 객관적인 명저에 대한 이해는 명저를 읽는 내 몫으로 남겨 두었다. 명저를 위한 가이드로  《조선 명저 기행》을 뜻깊게 읽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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