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 -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보랏빛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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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작품이 주는 아쉬움 그리고 여운,
나쓰메 소세키 《명암》

 

 

나쓰메 소세키.
일본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도련님》《나는 고양이로소이다》《런던탑》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 근대 사회를 표현한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고전 혹은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서가에 반듯이 놓여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만 인기 있는 작가인가? 아니다. 그는 2004년까지 일본 천 엔짜리 지폐의 모델이었으며,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작품이 미완이라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미완성작,  《명암》은 그가 신문사에 연재했던 연재소설이었다. 연재 중에 위궤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였고 188편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걸.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떠올랐다. 그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미완의 작품으로, 원래 지금 나온 분량만큼의 뒷이야기가 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은 지금 나온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뒷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지는 게 사실이다. 반면 나쓰메 소세키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보다 더 완성도가 아쉬운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의 《명암》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린 건, 마지막 작품이 미완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상한 정조를 일부러 속된 그릇에 담아 감상적으로 독자를 자극하는 책략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가 먹혀들어 간 덕분에 많은 모방자가 속출해서 터무니없이 저속해진 일송의 예술적 꼼수에 불과하다는 거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99쪽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의 글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고작 2주간 벌어지는 일인 '죄와 벌', 4일간 벌어진 일인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처럼 약 2주간 있었던 일이지만, 서사의 양이 장대한 점이 닮아 있다. 무엇보다 그가 만든 인물 속에 도스토옙스키 인물들의 성격과 글쓰기 방법이 닮아 있어 자연스레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작가'라는 권위 있는 주체가 없다. 작가 역시 하나의 인물로 소설 속에 참여하고 있다. 모든 인물이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이에 대해 작가는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저 이들의 목소리를 글로 옮길 뿐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다성악 소설이라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도 다르지 않았다. 각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장에서 한다. 작가가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한다.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평가과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최대한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작가는 이야기의 세계를 열어두고 있다. 주인공 부부 오노부와 쓰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낼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그의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신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말하는 때까지가 좀 길거나, 혹은 그 말할 때가 오기 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나서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 이건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지난 문맥에서 주인공의 생각을 유추하게 하기 보다, 주인공의 생각 그 자체를 그의 목소리로 전하는 게 독자들이 더 편하게 느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일일드라마 한편 한편을 엮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장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NHK의 아침드라마였는데, 15분 분량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이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 연재소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노부와 쓰다다. 쓰다와 오노부는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난 부부다. 아직 서로가 낯선 건지, 친해지지 못하는 건지 어색함이 감도는 보통의 신혼부부처럼 보인다.  1900년대 초, 일본 근대 사회에 젊은 부부의 자유로운 생각을 담기 위해  나쓰메 소세키가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이다. 이들 부부 곁에 가족, 직장동료, 친구의 관계가 부부 사이를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오노부가 쓰다네 집에 책을 빌리러 가서, 쓰다를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그 관계가 시작된다. 오노부는 쓰다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결정했고, 이를 부모님께 알리고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오노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그녀의 삶은 결혼과 함께 자신의 남편과 떨어트려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1900년대 초 일본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이해해야 한다. 그런 오노부에게 사촌동생 쓰키코는 묻는다. 자신과 결혼할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기코에게 오노부는 말한다.


"쓰기코, 너 알고 있니? 여자의 눈은 자기와 연고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눈이 잘 트인다는 사실을. 눈이 1초 사이에 10년 이상의 공훈을 세우는 건 그때밖에 없어. 게다가 그런 경우는 누구든 일생에 흔히 만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때에 따라서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눈 따위는 맹인이나 다름없어. 적어도 평소에는."


물론 이 대답은, 쓰기코와 오노부 사이에 미묘한 경쟁과 특수한 상황이 얽힌 결과물이었지만. 이 말속에 "오노부의 생각"은 분명히 담겨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옳다는 걸 만드는 건 자신이라는 답을 함께 얻는다.

 

 

아이러니 한 건, 이 말을 할 때 오노부는 쓰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어렴풋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을 때라는 점이다. 사실 오노부를 만나기 전에 쓰다는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쓰다 곁을 떠났다. 아무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쓰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보냈다. 그래서일까, 그 미련을 느끼고 있으며 그 미련은 아내인 '오노부'에게 미안함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내인 오노부를 사랑하면 되는데, 쓰다 사랑 대신 아버지에게 받은 생활보조금으로 오노부에게 반지를 사준다. 이게 오노부가 결코 원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처음에 무관심하게 보였던 그는 점점 자기 쪽으로 매혹된 듯 다가왔다. 일단 매혹된 그가 이번에는 차츰 자신에게서 멀어지며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의심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의심을 말끔히 떨어내기 위해 그 사실을 뒤엎지 않을 수 없었다."

 

쓰다와 오노부는 쓰다의 과거 문제에 대해 오노부가 먼저 입을 연다. 이 상황을 더 유지하는 것을 오노부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오노부가 쓰다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쓰다는 오노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쓰다가 오노부를 사랑했다면, 처음부터 이 문제가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되지 않게 정리를 했어야 했다. 혹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오노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렴풋 알게 되었을 때, 혼자 생각하게 만들지 않고 불안하지 않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쓰다가 한 건 피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쓰다는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숨기만 안 돼요. 당신이 숨기면 다음 말을 할 수 없게 될 뿐이니까."


물론 이 대화에서 쓰다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고, 오노부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관계를 만든 것은 쓰다이기에 그가 느낀 감정보다 이런 그를 바라보았을 오노부에게 마음이 갔다. 결국 쓰다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미련인지 사랑의 잔재인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끝내라며, 오노부는 쓰다에게 전 연인을 만나러 가라고 한다. 그리고 전 연인을 만나면서 이 소설은 미완의 결말을 내린다.

가장 중요한 때에 소설이 끝나버려 아쉽다. 처음에는 아쉬웠고, 왜 결론이 없는 건지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600쪽 가까이 되는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건 지금을 위한 토대였을 뿐이라. 그다음에 나올 결정적인 이야기가 중요한데, 나오지 않아서. 그런데 이야기가 비워둔 자리에 내가 설 수 있었다. 내가 소설에 참여하고 있었다. 궁금증으로, 오노부를 응원한 독자로.


쓰다가 과거의 연인을 사랑하는지. 그 연인 역시 쓰다를 잊지 못했는지. 사실 나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쓰다를 그 상황으로 만든 오노부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했다. 만약 옛 연인과 사랑을 정리하지 못한 채 쓰다가 돌아온다면 오노부는 어떻게 할까. 혹은 미련이 남았다는 걸 확인한 채 돌아온 쓰다를 오노부는 어떻게 대할까. 자신을 굳게 믿고,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는 오노부가 자신의 상황에서 무엇을 결정할까.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명암》은 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숙제를 남긴 채 나쓰메 소세키는 떠났다.

 

그의 마지막 작품 《명암》을 역자가 높이 평가한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끝난 서사 뒤에 자신의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여백 때문이 아닐까. 나쓰메 소세키의 죽음은 그가 결정할 수 없었지만.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이끌어온 이야기의 서사 그리고 모두가 주인공이게끔, 모두가 작가이게끔 만든 그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다고 난 생각한다. 나 역시 이를 높이 평가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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