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헤르만 헤세 지음, 추혜연 그림, 서유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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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기 자신,
오로지 자기의 운명만 원할 수 있을 뿐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는 책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그건 아마 유연하게 생각을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생각을 하고 누가 읽던 그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닌 걸 '명작'이라고 한다.
데미안은 여러 번 읽었지만 늘 새로웠다.


재미가 없어서, 재미가 있어서, 슬픔에 잠기게 해서, 기쁨을 누리게 해서, 나를 돌아보게 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데미안은 주었다. 이번에도 데미안은 이전과 다른 감동을 주었다.

 

조금 다른 지점을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위즈덤하우스 《데미안》만의 독특한 구성도 한 몫했다. 위즈덤하우스 《데미안》은 군더더기 없이 단백하게 데미안을 담아냈다. 작가의 이야기, 번역자의 해석이나 이야기 없이. 데미안만을 그린다. 텍스트로 그리고, 다른 데미안에서 볼 수 없었던 일러스트로 데미안을 담아 낸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그림은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해 이야기의 강하게 잡아준다.
  

 

처음 데미안을 만났을 때.
싱클레어가 방황했을 때.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이야기 서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그림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예쁘게 보여준다. 사진으로 찍지 않았지만, 소설 맨 마지막 장 그림이 난 가장 마음에 든다.

 


헤르만 헤세의 자화상 같은 소설, 데미안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려한 문장은 눈과 머릿속을 즐겁게 맴돌았다. 예전엔 그가 하는 이야기가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낯설었고, 모호한 그의 표현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불편하게 느꼈고, 그 불편함이 헤세가 전하고픈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뜬구름 같다. 하지만 그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태양이 함께 보인다. 그래서 구름 가장자리에 눈부시게 빛나는 "silver lining"이 보였다. 난 데미안이 그의 자화상, 내면에 켜켜이 쌓아 놓은 걸 말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어느 소설보다 빛나는 소설이다. 그 이유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가의 이야기보다 나에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_ 《데미안》 8쪽

 

세상에 헤르만 헤세라는 대작가의 명성을 내려놓고,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데미안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데미안은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독일 문학계는 싱클레어가 헤르만 헤세임을 밝혀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도전이 실패한 건 아니다. 그의 도전 결과가 시간을 넘어,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알'을 깨려는 도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단 한 가지뿐이었다.
데미안을 읽지 않았더라도,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알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동일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싱클레어 자신의 내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 데미안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동일인물 간의 내적 대화라고 보는 쪽으로 난 읽었다.) "이런 자극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로부터 왔으며 언제나 두려움과 속박과 양심의 가책을 동반했다. 늘 혁명적이었고 내가 기꺼이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라는 싱클레어의 말처럼 그는 누군가의 영향 하에 있는 '나'에서 독립적인 '나'로 존재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독립된 자신만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바로 데미안 이야기의 핵심 서사다. 정체성을 가진다는 건, 개인이 홀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한 세계나 한 공동체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데만 헤르만 헤세는 "정체성"을  세우는 이야기를 했을까. 난 그가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다.


아름답지만, 지금 여기저기서 성행하는 공동체는 전혀 그렇지 않아. 진정한 공동체는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새로 형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를 변화시킬 거야. 지금 있는 공동체들은 그저 패거리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야.
정체성과 홀로서기에 대한 이야기는 서두와 데미안이 끝날 무렵 두 번에 거쳐 분명하게 말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당면한 '전쟁'이라는 문제 앞에  나눈 대화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존재하는 공동체는 위태로우며, 필연적으로 해체와 와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될 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공동체가 공허한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공감대가 상실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건 두려움과 폭력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은 미쳐 날뛰면서 죽이고 말살하고 스스로도 죽기를 원했다.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야 했다." 그는 죽음과 부재 사이에 태어나는 것에 주목했다. 두려움과 폭력의 분출은 견디기 벅찬 '운명'의 힘이 비틀려 나온 흔적이며, 그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라고 말한 첫 장의 마지막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동일인물이고 이 소설의 싱클레어의 이야기, 두 사람의 대화 모두 싱클레어 내면에 있었던 거라면.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내적 대화가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를 해석한 개인들 간 대화가 보편적인 사회를 그는 꿈꾼 게 아닐까.
이를 신인 작가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던 건, 명성을 가진 작가로 그 대화를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개인으로, 막 등단한 작가로,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며 해석한 개인의 자격만으로 '서로'를 꾸려나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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