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나폴리 4부작 4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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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나는 우리 우정이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652쪽


약 60여 년의 시간 동안 공고한 듯 연약한 듯 이어져온 우정이 끝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우정이 끝났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시간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는 먼저 누군가는 나중에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 사이에 어떤 부재감과 존재감을 남길까. 

<나폴리 4부작>의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시작해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거쳐 잦아들기보다 증폭되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소설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과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라는 레누의 고백처럼. 진짜 우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는 건 어려울지 모른다. 사람 사이에 무수히 많은 관계가 있고 그 얽힌 관계가 나에게 남긴 것을 명확하게 안다는 건, 나를 잘 안다는 것인데.. '나'에 대해 제대로 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알게 되지 않은가. 

관계가 남긴, 감정이 남긴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음에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릴라와 레누. 두 사람과 두 사람 간의 수많은 관계가 남긴 흔적들은 600쪽이 넘는 이야기 속에 흩어진 듯 차곡차곡, 모순된 단어 외에 설명할 수 없는 양상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의 서사의 핵심을 그려내고 있다. 금발을 한 레누는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반면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릴라는 홀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릴라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두 사람과 떨어져 조금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릴라와 레누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지고, 한 달 정도 차이를 두고 출산한다. 레누는 니노와 함께 임마를 가지고 릴라는 엔초와 함께 티나를 가진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두 연인 간의 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3권에 거쳐서 레누가 드러내지 못했던 욕망의 대상이었던 니노는 3권 말미에서 연인으로 관계가 바뀐다. 결국 레누는 남편과 두 딸이 아닌 니노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결국 레누는 이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혼을 택하고 데데와 엘사를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올 계획을 하던 중에 니노가 그의 아내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레누는 이 사실에 몹시 분노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그의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대해 단호하게 끊어내지 않고, 그와 아이를 가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임마를 출산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레누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누는 그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니노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니노의 여성편력에 대해 적나라하게 목격하면서, 그녀는 니노와의 사랑을 끝낸다.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344쪽

레누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그녀의 첫 연인 안토니오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하게 된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레누의 삶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랑이 끝나서일까. 충족되지 않았던 '사랑'이 만든 삶의 허기나 '사랑'의 만족감이 잦아든 레누에게 찾아온 것은 작가로써 새로운 삶과 릴라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찾아왔지만 하나는 성취했고, 다른 하나는 종료해야 했다. (여기서 종료해야 했는지, 종료할 수밖에 없었던지, 그녀 스스로 종료를 택한 건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레누가 쓴 책이 릴라를 돌아서게 한 것인지, 잃어버린 아이가 릴라 삶에 준 충격이 더는 우정을 지탱하게 어렵게 한 건지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레누가 소설 말미에서 밝혔듯이 그녀 스스로 자신이 쓴 '어떤 우정'이 두 사람 우정에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종료해야 했다는 타의에 의한 듯, 자의에 의한 종결어미를 택했다.)  

난 소설을 읽으며 레누가 문학가로써 성공하길 바랐다. 여성으로써 계속되는 한계를 그녀가 이기길 바라며, 그 한계에 금을 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릴라와 우정이 지속되길 더 간절히 바랬다.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우정을, 60여 년이라는 시간을 지탱해온 관계가 이어지길 바랐다.  어긋난 듯 맞아들어간 두 사람의 우정이 왜 이어지길 바랐을까. 레누가 들은 것 외에 릴라의 생각은 철저히 배제된 레누의 자전적 고백인 이 소설 속의 레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레누가 소중하게 아꼈던 인형 그리고 릴라를 쏙 빼닮은 분신 같은 아이 티나. 인형은 레누에게 다시 돌아왔지만, 릴라의 딸 티나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레누는 릴라가 쓰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 '어떤 우정'이라는 소설로 세상에 드러낸다. 레누는 소설가로써 재도약에 성공했지만, 레누의 소설에 대해 릴라는 침묵했다. 꽤 긴 시간에 걸쳐온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의 우정을 깬 것은 누구일까.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레누를 이용했던 릴라일까? 릴라를 의심하면서,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때론 릴라가 싫어하는 선택을 알면서 했던 레누일까? 내가 바랬던 두 사람의 견고한 우정은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결론난 것처럼 끝이나 있었다. 관계가 끝났다는 분명한 결론 속에서도 난 계속 두 사람의 삶이 남긴 관계에서 흘러나온 감정에 '?'를 붙였다. 이건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나폴리 4부작'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옮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는 결론과 해결되지 않는 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꼭 물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중심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알아가고 이들의 매력에 빠지고 감정이입을 하고 주인공들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소설이 주는 진정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옮긴이의 말 중에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엘레나 피란테'가 2천쪽 가까이 되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와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맹가리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말했던 고백처럼, 자전적인 소설로 추정되는 '나폴리 4부작'은 작가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추론에 두고, 끊임없이 질문을 부르는 '나폴리 4부작'이 의미있는 이유는 옮긴이의 말처럼 재미도 크지만,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가볼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의 인물들의 삶의 선택과 결정과 그 인물들의 관계에서 흘러나온 감정들이 어떻게 피어나고 지는지를 살펴보는 과정.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분명한듯 분명하지 않은 소설 '나폴리 4부작'을 통해 내가 얻은 분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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