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라디오
남효민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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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 때문에 라디오를 이따금 듣는다. (중고등학생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좋아하는 오빠들이(?) 나오는 라디오를 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때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내가 좋아하던 오빠들의 흔적은 프로그램명에만 남아있었다. 몇 번 바뀌었을지도 모를 DJ가 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그때처럼 여전히 다정다감했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 여전함이 신기했다. 《그래서 라디오》는 그런 라디오를 닮은 에세이다.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고, 지금도 라디오 작가인 남효민 작가의 라디오에 얽힌 추억이 담긴 에세이다.

라디오는 그들이 던진 물음표에 마침표나 느낌표로 답하지 않는다. 때로는 다시 물음표를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공감만 할 뿐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는 얘기는 그냥 이렇게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담론이 아닌, 사소하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오늘의 일상. _205쪽

글을 읽다 라디오에 보낸 사연이 뽑힌 일이 생각났다. 이사를 하는 날 아빠를 도왔던 이야기를 사연으로 보냈는데, 아마도 사춘기라 아빠랑 서먹하던 때 오랜만에 아빠랑 좋았던 그 순간의 기억을 라디오에서 공감받고 싶었던 것 같다. 별밤 작가님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전화 연결을 할 거라고, 곧 다시 전화를 걸 거라고." 수줍었던 중학교 3학년의 난 어리벙벙하며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리액션에도 정신을 못 차린 난 통화를 마쳤다. 그런 일이 있어나 싶어하며 잊힐 무렵, 집에 꽃바구니와 구두교환권이 도착했다.

작가님의 글은 이렇게 내가 왜 라디오를 좋아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라디오로 사연을 보냈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글 자체가 추억을 부르는 라디오 같다. 누군가의 사연에 내가 그랬던 경험을 떠올리듯, 라디오가 일이자 삶이었던 작가의 글을 읽으며 라디오를 들었던 때 기억이 났다.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실제로는 가까이 있지 않지만 복닥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신의 일상을 일구는 또 다른 사람과 연결된 듯한 긴밀함과 그 사람의 고민에 들어가서도 하고, 기쁜 일에 같이 좋아해 주고, 슬픈 일에 마음 아파하며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유대감을 느끼게 만드는 라디오가 난 좋았다.

이젠 과거형이 되어버린 것이 조금은 서글펐다. 라디오에 푹 빠졌던 나의 한 시절의 추억과 감각이 옅어짐을 확인할 때 기분은 아쉬울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 아쉬움조차 잊고 있었던 나에게 라디오가 주는 다정하고 따뜻한 감촉이 무엇인지, 기억에 새겨져 희미해진 마음마저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과거로 지나갈 오늘의 풍경을 붙잡아 말로 적어내는 라디오 작가에게도 글로만 잡을 수 있는 추억 중 유독 아프고 또 아쉬운 것을 볼 때면 같이 아릿했다.

그래도 "그럴 줄 알았던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라디오도 그럴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라디오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라디오 안엔 사람이 있으니까."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남효민 작가님의 글이 씩씩해 좋았다. 그래서 나도 오늘도 라디오에서 닿지 않을 누군가를 말로 이야기로 발견하여 이어주는 무수히 많은 라디오 작가님의 글이 오늘도 내일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쩌면 10년 전, 처음 내가 라디오를 들었던 때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10년이 지나서 오랜만에 들어도 여전한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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