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ㅣ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평점 :
사각사각. 연필을 난 좋아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친구들은 하나 둘 톡톡 누르면 나오는 샤프를 쓰기 시작했다. 유행처럼 샤프를 쓰기도 했지만, 난 연필이 더 좋았다. 왜 좋았는지 생각해보면, 사각사각 아빠가 연필을 깎아주는 시간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
일요일 밤이면 한손 가득 연필을 들고 샤워하고 나온 아빠에게 뽀르르 다가가 연필을 깎아달라고 했다. 연필깎이만 3개가 있었지만, 일요일 밤마다 아빠에게 연필을 칼로 깎아달라고 조르는 시간이 난 좋았다.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는 아빠 옆에 붙어서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고 쫑알쫑알 거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다. 더는 아빠에게 연필을 깎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민망스러운 나이가 되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난 그때가 좋았다. 지금도 연필을 칼로 잘 깎고 싶어 몇 차례 시도했지만, 여전히 나는 연필을 잘 못 깎는다. (그리고 칼로 능숙하게 연필을 잘 깎는 사람을 보면 굉장히 멋져 보인다)
⠀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
⠀
이 책의 에피소드는 내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자만의 경험이 단단한 흑연처럼 뭉쳐져 있었다. 그 속으로 닿기 위해 열심히 나무를 깎듯 이야기를 읽었지만, 나는 충분하게 그 이야기에 닿지 못한 것만 같다. 어쩌면 난 2B 정도를 기대하고 읽은 이야기에 4B 정도의 이야기 아니 그 이상의 진하기를 가진 이야기를 만나 그럴지도.
⠀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
이야기 중간중간에 어떤 문장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작가의 이야기를 연필과 엮어낸 글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