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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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려지는 글이 있다. 글을 따라가면 머릿속에 인물이 그려지고 배경이 나타나고 바뀌는 글. 그르니에 글이 그렇다.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이미지가 떠올랐고, 이내 바뀌었다. 그르니에 선집 시리즈는 1980년에 출간되었고, 새로이 번역해 새 커버로 재출간한 것으로 《섬》은 그 첫 번째 책이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_29-30쪽

이 책은 읽으면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이내 다음 이미지로 또 바뀐다. 잔상조차 남길 수 없는 희미한 이미지만을 남긴 채 이어지는 다음 이미지는 여전히 희미하다. 어떤 글은 힘을 강하게 주어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곤 한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듯한 글이었다. 희미한 이미지만 남는 글이 처음엔 낯설고 어려웠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_ 73쪽

하지만 읽다 보면,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이웃과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며(소소한 이웃갈등) 동물과 함께하며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충분히 즐기며 사는 삶에 대한 글이었다. 무엇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주어진 것을 부정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사는 인생에 대한 글이었다. 밍밍하고 심심한 하지만 매력적인. 마치 떡볶이 덕후인 내가 오리지널 평양냉면을 맛보았을 때 느낌이랄까.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군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_80쪽

여백이 많고 흐릿하기에 이런저런 내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오묘함이 있다. 마치 존 버거의 글을 읽었을 때 느낌과 아주 비슷했다. 별것 아닌 일상을 나열한 글에 나의 삶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 그르니에 글이 나에게 그랬다. 아마 그래서 카뮈가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드는 글이라서?

내가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언제 읽고 싶을까 생각해보았다.
읽고 싶은 책을 한 가득 가지고 고요한 곳에 들어가 책만 읽으며 한 달 정도 살고 싶다. 글을 쓰겠다는 목적이나, 득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채가 아닌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글을 읽고 또 읽는 것만을 즐기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잡생각에 시간을 내어주며. 한참 딴청도 좀 부리며. 그러다가 다시 '이러면 안 되지' 싶은 마음에 다시 읽으며. 그러다 좀 졸기도 하며. 그렇게 뒹굴뒹굴하며.
그런 순간이 온다면, 머리맡에 두고서 낮잠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좀 일찍 오면 좋겠다.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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