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 조지 6세가 로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장면이 있다. 말을 더듬게 된 이유와 닿아있는 꺼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유모에게 받은 학대 경험, 말을 더듬을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받았을 냉혹한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말을 더듬는 건 그가 자신이 너무 무서운 상황에 있으며 위협에 놓여 있다고 외치는 절규였지만 그걸 알아채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영 제국이라고 불렸던 나라의 왕자도 그랬는데, 가난한 집 아이는 어떨까. 말을 더듬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남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환경과 유전자 암호 모두가 생명 활동과 행동 모두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생각해보면, 본성 대 양육 논쟁이 명백한 승자 없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것도 놀랍지 않다. 다행히 과학의 진보 덕에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모습과 신체가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동시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_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165쪽
어린 시절에 겪은 정서적 학대가 트라우마가 되어 삶에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상처 정도였다. 흉터가 남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상처.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만이 아니라 질병에 취약해져 건강까지 잃게 만드는 위협이기도 했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는 사회 문제를 보건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책으로, 난 어린 나이에 정서적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가 느끼는 삶의 위기감은 느낌을 넘어 생명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마음이 아팠다.
저자는 "불행은 한 아이의 발달 궤도를 틀어놓고 생리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평생 안고 가야 할 만성 염증과 호르몬 변화도 촉발할 수 있다. DNA를 읽는 방식, 세포의 복제 방식을 바꿔놓을 수도 있으며, 심장병과 뇌졸중, 암, 당뇨병, 심지어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까지 급격히 증가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제도적으로 어린아이가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드는 데 있다.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에 등장한 아이들은 자라지 못했고, 자주 아팠고, 불안해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바꿔주었을 때, 비교적 쉽게 호전되었다. 절망이란 상황에서 조금만 벗어나게 해주면, 아이의 건강은 더 나아졌다. 유전자와 환경이 아이에게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지만, 그 역시 방지할 수 있는 문제이며 나을 수 없는 불치병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방지하기보다 방치해온 문제였기에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 난제다.
우리 사회에 산재한 많은 문제의 원인이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아이들이 겪는 부정적 경험을 줄이고 보호자들의 완충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들이 그 해결책으로 의미가 있다.
_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394쪽
아이가 겪는 트라우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저자의 이야기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의사가 썼기 때문에 딱딱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심리학자가 쓴 듯싶었고, 저자의 글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드는 순간이 많았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해결을 위한 노력은 별것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별것조차 받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에 놓인 아이에게는 너무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말한다. "프레임을 바꾸고 렌즈를 바꾸면 어느 순간 갑자기 감춰졌던 세계가 드러나 보이고,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라고. 아직 그녀가 노력한 결과로 일구어낸 것은 예방법에 불과하다. 그래도 질병의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 이 병을 낫게 할 백신도 나오지 않을까. 모든 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치료제보다 아예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