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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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다. 아슬아슬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불안함은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주었다. 한 번이겠지 생각했던 당황스러운 일은 연이어 터졌고, 소설을 읽는 나의 마음을 할퀴기 바빴다. 불안함을 느꼈다는 건, 그 불안한 서사 후에 오는 일들이 충격적이었다는 건, 내가 참 모르는 게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스물네 번째 소설 김기창의 『방콕』은 그런 소설이었다.

훙은 탱크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손가락 세 개를 잃었다. 베트남 출신 이주 노동자였던 그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 하게 되었고, 할 수 있었던 노동을 못하게 되었음에도 그는 윤 사장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은 공장에서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윤 사장은 훙을 거절한다.

손가락이 세 개 없는 그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훙을 거절한 윤 사장은 몰랐다. 그의 거절이 손가락 세 개를 잃었을 때보다 훙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는걸. 훙은 한때 "일으켜 세우고 싶어."라고 말했던 그녀, 정인에게 자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 주려고 결심한다. 정인은 손가락을 잃지 않았지만 영혼을 잃어버린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다.

정인의 오빠 정우는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는 섬머와 사귀는 사이다. 섬머는 한국인 정우가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에 장난으로 힐난하는 동물보호에 앞장서는 열혈 동물보호센터 매니저다. 한국 농장에서 사육용으로 죽임 당할 뻔한 강아지 60마리를 입양한 섬머는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윤리에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방콕에서 아버지와 동거하는 와이에게 대하는 태도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캐나다에서 온 섬머의 다정한 아버지 벤은 자신의 딸과 같은 또래인 방콕 여자 와이와 동거를 한다. 벤과 동거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의미로 내비칠지를 모두 알지만 그럼에도 와이는 벤과 살림을 차렸다.

와이는 벤의 아이를 가진다. 뱃속의 아이에 대해 와이는 불안을 느끼지만 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섬머 역시 무관심하다. 임신했을 때도 와이가 벤의 아이를 낙태할 때도 섬머의 행동은 무서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이를 잃은 와이를 위로하는 시간은 짧았고 그녀를 다시 안는 시도는 빨랐는지도 몰랐다.

한 명 한 명이 겪는 사건과 가하는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져서 읽는 내내 불안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방콕 도시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삶에 습격했다. 그 습격을 보며 불안했다. 이제는 그만했으면 싶은데 재앙은 멈추지 않았고, 그 재앙에 무뎌져 가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등장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을 겪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무서웠던 이유. 그런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데서 오는 충격도 있었으나. 내가 그들의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달랐을까를 가늠했을 때, 타인의 고통에 무딘 내가 보여서 무서웠다. 타인의 불행에 선을 긋고 내 일이 아니니까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 없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신문을 펴면 불행의 스케일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마치 『방콕』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그런데 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시간은 나날이 짧아져만 간다. 신문의 다음 장을 넘기는 속도가, 스마트폰으로는 클릭으로 다른 뉴스로 넘어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때때로 그런 뉴스에 눈을 질끈 감고 피할 때도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싶지 않아 피했던 부끄러운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렇게 되어가는 나 자신이 무서웠다.

내 질문에 대답해 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 뭐야?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 거.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거.

50쪽

난 선한 사람이 아니야.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 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53쪽

누군가의 존엄이 짓밟힌 자리에 잠시 동안 눈을 머무르기를 피했던 난, 소설 속 인물이 묻는 질문에 오래 마음이 찔려 오래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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