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임희정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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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는 임희정 작가의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글처럼 애틋함과 저릿함으로 마음에 닿는 글도 있으나누구나 한 번쯤 부모님과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잔잔한 이야기로 공감을 전하는 책이다분명 그녀의 삶과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이지만, 여러 글이 엮어진 책에서 난 나의 모습과 우리 부모님의 삶을 발견하며 공감했기에지난 2월에 실시간 검색어를 통해 처음 그녀의 글을 읽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울림이 크게 뜻깊게 다가왔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우리 부모님이 떠올랐다특히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나는 부모님께 좋은 딸이 아니다어쩌면 나쁜 딸일지도 모른다부모님은 나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아서 잘 커준 고마운 딸이라고 말하셨고나는 내가 그런 줄 알았던 못난 딸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 부모님은 참 바쁘셨다. 실제로 바쁘셨고, 내가 칭얼거릴 여유가 없어 보였다. 어른이 되어서 응석을 부리지만, 오히려 어렸을 때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난 뭐든 알아서 결정하고 부모님께 꼭 전해야 할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구분할 줄 알았다.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라 생각했고, 늘 감당할 수 있을만한 일만 찾아왔기에 난 어려움 없이 자랐다그렇게 했던 생각이, 행동이 언젠가부터 습관이 되어버렸다중학교 이후 나와 부모님과 대화는 상의일 때보다  나의 통보인 경우가 많았다진학전공연애친구까지중요한 결정은 내가 다 답을 내린 후, 그 결정을 부모님께 들려드렸다. 부모님은 나에게 질문하지 않으셨고, 나도 으레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했지만사실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내 고민을 나누어야 할지 몰랐다고민에 공감받기 보다 고민을 잘 해결한 모습을 전하는 것이 더 좋았다. 대화보다 딸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부모님께서 나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역시우리 딸엄마 아빠는 너를 믿어!” 였. 그 말을 듣는 것이 좋았고, 실제로 부모님은 시종일관 나를 믿어주셨다. 때때로 그 믿음에 실망을 안겨드리기도 하였음에도 굳게 나를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나는 참 좋았다. 그래도 엄마와는 목욕탕도 다니고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사춘기를 지나며, 아빠와는 이상하게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아빠와 나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고때였다아빠는 밤 10시면어김없이 버스 정류장에 마중을 나오셨다괜히 보지도 않으면서 챙긴 책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주시며 오늘은 어땠냐고 넌지시 물어보셨다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처음엔 짧은 대답과 침묵이 그다음엔 아이스크림 먹는 소리로 채워졌던 시간이 따뜻해지는 날씨처럼 바뀌어갔다. 그리고 다시 수능이 가까워져 추워졌을 때에 나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고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재잘 꺼내기 시작했다먹고 싶은 음식모의고사 지문 이야기 등 별일 아닌 이야기였으나 쏟아내는 이야기를 아빠는 가만히 다 들어주셨고, 나의 응석에 맞장구까지 쳐주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정말 수능날이 되었다. 내 수능 도시락은 아빠가 싸주셨다긴장하면 밥을 잘 못 먹는 딸을 위해 찹쌀과 쌀을 섞어 끓인 흰죽. 국물보다 아욱이 더 많이 담긴 된장국깨가 박힌 포항초 무침잔멸치와 견과류를 볶은 것물엿을 넣지 않은 연근들기름 냄새가 고소한 김구이간을 하지 않은 달걀말이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아빠에게 했던 딱 내 입맛에만 맞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먹었던 가장 맛있었던 도시락이었다. 

 

좋아하는 취향이 분명한 딸이 수능날 불안함에 허한 마음을 사랑 가득 담긴 음식으로나마 든든하게 채워주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이 담긴 점심 도시락이었고, 빈 도시락 통을 아버지는 하루종일 기다리셨을 것이다그 도시락을 결국 집에 와서 가채점을 다하고저녁으로 먹는데 눈물이 나왔다시험장에서 몇 수저 먹지 않고 넣어둔 죽과 국이 차갑지 않고 따뜻해서꼭 아빠 마음 같아서 울었다시험을 망쳐서라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에 기대어 참 많이 울었다.

 

이 기억이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까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읽는 내내 아빠 이야기에엄마의 음식 이야기에 철렁하고 마음이 내려앉아 눈물이 자주 맺혔다내가 생각하는 최선이 부모님께 최고일 거라 믿었는데, “그래서 나는 많이 그리고 자주 알아서 했다그게 무엇이든뭐든 알아서 하는 딸이 엄마 아빠는 편했을까불편했을까사실 나는 부담스러운 딸이었다.”라고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에게 받은 편지에 한 부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 혜란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면 너무나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혜란이가 혼자서 혜란이가 할 일을 알아서 너무나도 잘해줘서 고맙구나.” ‘혼자 혼자서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 아빠의 편지는 자랑스런 아빠가 되기 위한 다짐과 약속으로 채워져 끝이 났다혼자서 알아서 하는 딸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그런 딸에게 자랑스런 아빠가 되기 위해 새벽에 잠을 줄이며 새 편지를 쓰셨다.

 

 

 

이 책을 읽은 후 그 편지가 다르게 마음에 닿았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에게 부모님을 양보하며 자랐다고 생각했다불평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늘 믿는 든든한 첫째 딸이었고, 동생에게 가는 일상에서 받는 사랑을 덜 받는 걸 이해하는 딸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곤 했는데아니었다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란 줄 알았던 지난 내 삶은 알고 보니 부모의 사랑으로 차고 넘치는 날들이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나는 동생에게 쏟은 부모님의 사랑과 다른 또 다른 사랑을 넘치게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다.

 

임희정 작가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부끄러웠다그러다가 나는 계속 나쁜 딸로만 머물고 있는 걸까라는 투정이 나왔다위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그 자체가 위안이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더 작아지려는 찰나부모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몹시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을 걸어오며 그 순간까지 돌아본 글을 읽었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삶마음을 보여주는 관계나를 해체하기쉽지 않지만 앞으로의 연분들 속에서는 그렇게 마주하고 싶다내 안의 경계를 잘 지나고 나면 꽃이 핀다고 믿으니까나는 쓰고 말하며 피어날 것이다.”

 

나에겐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안의 한 경계를 지나는 중이 아닐까15년 전 아빠의 마음을 가늠하며  흘린 눈물이. 나에겐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내 안의 한 경계를 지나는 중이 아닐까. 이젠 괜찮겠지 싶어 책을 읽다가또 울어버렸다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여운이 어찌하지도 못하고, 눈물로 바뀌어 있었다책장을 넘기듯 지나가는 나의 이야기가 임희정 아나운서의 책에서는 자꾸만 멈추었다.

 

눈물이 부른 우리 부모님과 나의 추억을 떠올렸다바쁘다는 핑계로 넘어가고 지금 당장 내가 더 중요하다며 생각하지 못한 순간들이 눈물과 번져 만화경처럼 눈앞을  스쳤다죄송하고 부끄러워 나온 눈물이 이제는 괜찮은 것 같다눈물이 마른 뒤에 생기는 자국이 만든 경계를 넘어 만날 나를 기대하면 되니까그렇게 경계를 넘어나도 겨우 자식이 되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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