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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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이 찾아오기 전에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계절에 먹을 수 있는 머위대(머구대) 나물이다. 물에 불려서 겉의 껍질을 손으로 까야 하는 수고로움을 거쳐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올해도 나는 머위나물을 먹었다. 큰 대야를 앞에 두고 머위대를 손으로 까야 하는 수고로움을 맡은 아버지와 들깨 양념으로 맛있게 볶아주신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맛있게 볶은 머위대 나물을 먹을 때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 머위대를 꺾어 불려놓던 외할머니의 등이 떠오른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는 외할머니 기억과 함께 지금의 부모님의 등을 떠올리지 않을까. 고개가 뻐근해 가끔 고개를 돌리면서도 손끝으로는 머위대 껍질을 벗기는 아버지의 등과 내 귓가에 "딸이 해달라고 하니까 해주는 것 봐."라며 속삭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누구나 자신의 추억이 닿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먹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음미하게 되는 음식이 말이다. 그것이 소울 푸드라고 생각한다. 위장만이 아니라 어딘가 허기진 마음까지 모두 채울 수 있는 음식이 말이다. 지난달 초에 맛본 머위대 나물이 떠올리게 만든 책을 읽었다. 좀처럼 떠올리기 쉽지 않은 기억인데,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를 읽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저마다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소울푸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음식 에세이다. "책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맛이 있고 없다는 비평이 아니다. 그보다 음식에 담긴 추억과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만들기 위해 견디고 버텨야 했던 시간을 쓰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음식을 먹고 느낀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 것이다. 그토록 지루한 하루를 매일 견디던 형, 죽을 나에게 사다 준 그 형은 마침내 고시에 합격해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나는 내가 죽을 만드는 정성과 같은 지루함을 벗 삼고, 흰죽과 같이 하찮은 나의 하루를 감사하길 바란다. 그 뜨거운 한 그릇을 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길 바란다.

_ <뜨거운 한 그릇의 진심, 죽>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셰프의 길을 걸어갔던 정동현 작가는 자신의 지난 삶의 순간마다 함께 했던 음식을 곱씹는다. 셰프의 길을 걸었다고 하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음식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던 닭칼국수와 비빔국수, 생일날 먹었던 미역국, 쌀과 물로 만든 하얀 흰죽, 돈가스, 우동, 라면, 마들렌, 소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알 법한 맛이 혀를 감돈다. 그의 추억과 닿고 요리하는 사람으로 진지한 그의 태도와 닮은 음식 이야기는 머금직스러우면서 동시에 짠한 감동을 준다.

처음에는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요리사의 길을 걷는 수련생으로 맛본 서글픈 음식 이야기가 그리고 호주에서 셰프로 활동하며 겪었던 요리사로써 맛 이야기로 옮겨간다. 조금씩 다른 결의 이야기이지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신기한 글들이었다. 그의 추억인데, 이상하게 나의 추억을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과 닿은 돈가스, 양념치킨, 유니짜장, 불 맛은 나는 경험하지 못한 맛인데.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알 듯싶었다. 취업 준비를 하다 지친 형에게 끓여준 죽 한그릇에 담긴 마음이 무엇인지 알듯 싶었다. 그렇게 알 것 같은 맛과 알 것 같은 감동이 혀와 마음을 자꾸 움직였다. 왜 그랬을까?

그의 글에는 맛이 아닌 그때 그 순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했다면 행복했던 순간이 슬펐다면 마음이 아려왔던 순간이 그리고 힘겨웠다면 버텨내야 했던 견딞의 순간이 음식과 함께 담겨 있었다. "나를 얼마나 갈고 또 갈아야 할까? 잠을 이루지 못했고 바다 건너 울적할 때마다 칼을 갈았던 이를 떠올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몇 해가 지난 지금도 나는 칼을 잡을 때의 짜릿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를 피로하게 만들고 한밤중 울게 하였던 그 막막함 역시 마찬가지다." 대기업을 다니다 늦은 나이에 요리를 배웠던 그에게 칼은 이와 같은 여운을 남겼다. 추억을 말하는 음식에서 셰프가 되기위한 수련생으로 그리고 셰프가 되어 세상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요리인으로 나아가는 그의 글을 따라가면 음식에 대한 추억만이 아니라 내가 먹는 한 그릇에 담긴 음식에 담긴 정성의 크기가 느껴졌다.

맑았던 영국의 하늘, 런던의 오래된 공기, 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나눴던 사람들. 황금빛 마들렌과 함께한 점심, 순간 찰나. 너와 나의 웃음을 잊지 못한다. 잊지 않는다.

_ <몽글거리는 따스한 감각, 마들렌>

오늘 나는 누구와 음식을 먹었을까?

그 음식을 먹는 순간의 나는 어땠을까?

내 앞에 앉았던 그 사람은 어땠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을 언젠가 기억할까?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이었나 생각해보았다.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에 남는다면 더 좋겠지만, 꼭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를 읽으며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때때로 위장이 아닌 마음을 채우는 든든함을 준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누군가 함께 먹는 한 끼가 추억이 된다면 좋고, 행복함으로 남아도 충분할 것 같다. 정동현 작가처럼 음식 하나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행복한 밥 먹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다. 우선, 매일 아침과 저녁 부모님과 함께 먹는 식사에서부터. 나의 소울 푸드의 팔 할 이상이 부모님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를 읽으며 정동현 작가와 함께 곱씹을 수 있는 음식을 계절마다 만들어주시는 부모님과 함께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궁금한 마음에 엄마에게 저녁 메뉴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집 밥"이었다. 시니컬한 우리 엄마의 오늘의 "집 밥"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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