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2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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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네. 그건 임 작가님도 마찬가지일 게지. 그림이든 소설이든, 예술이란 게 말씀이야, 양달만 있으면 되질 않아. 응달, 평생 가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뛰어난 작품을 낳는다네. 자궁 마마께서 임 작가님의 탁월한 솜씨만 보고 『산해인연록』을 지어 달라 청하진 않았을 거야. 물론 임 작가님이 뛰어난 소설가인 것만은 분명해. 거기다가 갑자기 닥친 불행과 고통과 슬픔까지, 작가와 독자로서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연은 없겠지" _ 138쪽


정조시대, 그 때가 왜 대소설의 시대였을까.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읽고 쓰고 나누는 문화가 퍼저나간 때, 한글이 보편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한글로 된 소설을 읽기 시작한 때여서. 그때가 대소설의 시대였을까. 저자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또 다른 사건을 이야기로 끌어온다.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1785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과 천주교 모임을 하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발각된 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한 것을 이야기로 끌어온다.


왜 18세기에 대소설(장편소설)이 크게 풍미했지만, 이어지지 못했는지. 소설가 김탁환은 소설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대소설과 시대를 엮어냈다. 그가 쓴 건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더한 소설이다. 어쩌면 소설가 임두의 소설이 이상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탄탄하게 대소설을 완성해오던 소설가의 내적 토대가 바뀌는 진통이 소설에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인지증이 아니라 생각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황이 소설에 투영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소설에 투영한다. 남존여비, 유학 사상에 익숙했던 임두 작가에게 '야소교'는 신문물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낯섦 자체였던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건, 작가에게 큰 변화였다. 소설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지는 건 영원히 스물 네살이고 싶은 인지증을 앓는 어르신이 되어버려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스물넷처럼 쓰고 읽고 옮겨 적으며, 스물넷처럼 살고 싶다. 솜씨는 지금이 더 낫지만 즐거움은 그때가 더 컸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_ 93쪽


나는 야소교 즉, 그 시대의 천주교와 대소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묘하게 닮아보였다. 18세기 조선시대에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천주교는 '실학'을 주장한 '지식인'과 '여성'들 사이에 전해진다. 지배계층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두 소재는 비슷하다. 물론 오늘날 천주교 신자가 많지만, 당시에는 큰 탄압을 받았고, 여성이 중심이 된 대소설 역시 서서히 잊혀져간다. 천주교는 음지에서 끊임없이 포교해오는 사람들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쉽게도 존재조차 몰랐던 18세기 장편 소설은 '기억할만한 역사'로 명명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나는 여성 주도의 한글 장편 소설이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게 되면 흔히 범하는 실수, 저 사람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는 환상과 거리를 두기로 한 것이다. 사랑할 때조차 모든 언행이 진실은 아니며, 사랑하는 척할 때는 더더욱거짓이 섞여 든다. 임승혜는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드러내는가. 임승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경문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두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가. 또 어떻게 어디서 헤어질 것인가. _ 12쪽


왜 잊혀졌을까.
잠깐 그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로 대소설의 가치는 끝일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일까. 저자는 왜 잊혀졌는지를 묻는다. 23년 동안 이어진 대소설, 『산해인연록』이 완결이 된 순간 소설은 끝나지 않고 그 뒷이야기가 한참 더 이어진다. 말을 아끼고, 마음을 들어내길 아끼던 인물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알려지며 끝난다. "인간의 희노애락과 한 가문과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녹인 것이 소설이라 말한 임두의 철학은 이 소설에서도 유효했다. 그 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나있던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한 김탁환씨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떤 소설이든 영원할 수 없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소설 속 이야기는 끝난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의 현재와 미래만 남는다. 『대소설의 시대』는 독자에게 소설이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1권에서 말했다. 소설가가 집필한 이야기를 필사하고, 읽고, 이야기하는 중에 독자에게 무슨 일이 얼아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소설 속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들의 생각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물었다면, 『대소설의 시대 2』는 시대가 소설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집중하며 읽었다.


야소교에 영향을 받은 임두처럼. 자신의 토대가 움직이는 경험이 소설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소설은 말하고 있다. 대소설이 그때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소교와 같이 새로운 문화적, 정신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야기로 그 충격을 풀어냈다. 작가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책을 필사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삽화를 그리고 누군가는 말하기 바빴다. 흥미로운 건 그 과정 중에 같은 생각은 없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_ 298쪽


하나를 보고 저마다 생각을 이어나갔던 이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이들. 그들에 의해, 새로운 변화에 의해, 어떤 소설은 끝나고 다른 소설이 시작되었다. 대소설 그 다음 시대에는 어떤 소설의 시대가 시작되었을까. 지금은 어떤 소설의 시대일까.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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