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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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장편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리심』이란 소설이었다. 매혹적인 표지에 이끌렸고, 멈출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단숨에 다 읽었다. 그때는 몰랐다. 『리심』의 저자가 그 유명한 김탁환 소설가라는 사실을. 김탁환 소설가는 역사에 자신만의 색을 입혀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다. 술술 읽히는 이야기는, 정말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턱 걸리는 것 없이. 그가 이번에 포착한 시대는, 18세기 조선, 정조가 왕으로 즉위했을 때다. 왕실이 등장하지만, 정조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왕실 어른은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뿐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말 그대로 대소설이 유행했던, 그 시대가 주인공이다. 23년간 199권의 소설을 집필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소설이다. 이야기 꾼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 궁중 여인들도 있다.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가 채근할 만큼 이야기꾼의 대소설은 흥미진진했다. 그 이야기가 5개월째 진행되지 않고 있다. 좋아하는 웹툰이나 웹 소설이 휴재에 들어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순정만화가 "작가님 개인 사정"으로 연재를 쉬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다음 이야기를 알고 싶은 마음에 절로 서운한 말이 새어 나왔다.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도 나와 같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김진과 이명방 두 사람을 통해 임두 작가의 상황을 살펴보라고 시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이 임두 작가와 제자들을 만나본 결과, 작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한다. 인지증에 걸린 임두 작가는 자신과 이야기를 모두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진짜 임두 작가가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상황을 왕실에서 결국 이를 알고, 소설 결말을 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김진과 이명방은 이 모두의 손녀 임승혜와 제자 수문과 경문과 힘을 합쳐 소설을 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대소설의 시대 1』은 임두 작가를 대신해 제자들에게 결말을 쓰도록 명령도 내리지만, 만족스러운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손녀 임승혜의 도움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낼지 그 실마리를 얻는 내용에서 마무리된다.


물론 『서유기』처럼 우리가 사는 이곳과 다른 먼 곳을 누비는 소설도 흥미롭긴 하지만, 이 나라 이 동네 이 가문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매순간 주어진 예법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각종 차이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여인들을 담고 있는 소설 또한 소중하다네. 크고 강하다고 멋지고 작고 약하다고 시시한 게 아니란 걸세. 남자를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알고 느끼려면,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들여다봐야 해. 말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말하기 싫은, 그래서 담기지 않은 여백의 속마음을 곰곰이 따질 필요가 있지. 대부분의 남자 작가나 남자 독자가 눈치채지 못한 이야기들! 비탈을 구루는 세계가 갑자기 커진 셈이지. 소설들이 넓거 깊고 길어지자, 여자 작가들도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지. _ 46-47쪽


『대소설의 시대 1』은 대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에서 소설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여성 독자가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남존여비 사상이 공고하게 자리했던 조선 후기. 그때 여성 작가가 소설을 쓰고, 이를 여성 독자가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김탁환은 『대소설의 시대 1』에서 묻고 있었다. 그 여성 독자의 층위 역시 다층적이었다. 궁중의 큰 어른부터 세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같은 소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100권, 200권에 달하는 긴 장편 소설을 읽는 이들의 생각에 어떤 서사를 품게 했을지 궁금하다. "임두 작가님이 홀로 23년 동안 쓴 거작이지만, 그 밑바탕엔 이처럼 여자 독자들이 백 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라는 분석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읽고 쓰고 그 감상을 나누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임 작가님이 얼마나 귀한 소설가인지는 안다 이 말이오. 그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여태껏 살아오며 마음에 품었던 여인들과의 추억이 떠오르고, 또 제대로 잘 살기 위해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도 되돌아보게 되오. 소설이 읽는 이들에게 그처럼 귀한 선물을 준다면, 소설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오." _ 309쪽


과연 2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1권에서 임두 작가와 『산해인연록』의 결말을 찾기 위한 추리와 고민이 이어졌다면, 2권은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1권이 대소설, 장편 소설에 집중한 서사는 2권에서 시대라는 서사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음이 궁금해서 계속 읽었던 나처럼, 다른 독자분들도 1권을 읽은 후 재빠르게 2권을 읽어보면 어떨까.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다가 서안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자랑하듯 떠드는 소설가도 있지. 무책임한 짓이야.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소설은 마무리 지어야 해.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는 인간이 소설가이듯 끝내는 자도 소설가여야 하거든. 끝내지 못한 채 쓰다가 죽어 버리면, 그 소설은 영영 미완성으로 남아. _ 150쪽


소설가가 미완으로 이야기를 끝내면 안 되듯, 왠지 독자인 나도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그래서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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