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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나인…… 텐…….
짧다. '100페이지의 미학'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듯 짧고 강렬하다. 마치 링 위에 서 있는 선수의 싸움이 펼쳐지듯 빠르게 주인공의 삶이 지나갔다.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신작 소설이다. <록키> 시리즈도, 실베스터 스텔론도 몰랐지만 소설을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른채 읽어서 난 더 좋았다. 주인공 리즈가 삶을 다른 삶을 결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생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 리즈가 영화 <록키1>과 <록키2>를 보지 않고 <록키3>을 보았을 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처럼. 긴 호흡의 소설을 즐겨 읽던 나에게, 100페이지 분량. 짧은 단편 소설이 주는 강렬한 한방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평범하게 변화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리즈의 생각이 짧은 문장 속에 숨어있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오로지 독자의 생각에서 재창조해야 한다. 단편 소설은 생각을 문장 뒤에 숨겨놓고 독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듯싶다.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주인공 리즈가 <록키3>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우울증이나 무기력함은 아니었지만 의사 공부를 멈추어있던 리즈는 <록키3>과 함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다시 의사 공부를 시작하고, 의사가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실베스터 스텔론을 위해 저축을 하고 그녀는 죽는다. 무기력한 리즈가 록키와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록키3>이 그녀의 삶을 바꿔준 듯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록키3>을 본 사람들이 리즈 말고도 정말 많이 있지만, 리즈와 같은 사람은 별로 없다. 어쩌면 리즈뿐일지도 모른다. <록키3>의 주인공 실베스터 스텔론은 다른 삶을 살게 될 계기를 함께 열었던 것이다. 더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리즈의 삶에 변화의 계기를 선물해준 것이 아닐까. 그 이후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변화 이후에 리즈는 삶에 적극적이었다. 의사 공부도 집중해서 했고 결국 의사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록키3>과 실베스터 스텔론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정확하게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 실베스터 스텔론을 놓을 수 없었다. 그건, 지금의 그녀가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 즉 실베스터 스텔론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에 대하여 스스로 인정하지만 남편 장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장에게 솔직하게 다 말하지 못한다. 이 점이 흥미로웠다. 자신을 다른 삶으로 이끌었고 그렇기에 장을 만나 토마스와 앙투안을 낳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실베스터 스텔론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독특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측대로, 장은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이해를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일까. 내가 새로운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이지만, 진짜 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걸?
《나의 마지막 히어로》에서 리즈는 혼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감당한다. 영화로만 만났던 실베스터 스텔론과 함께. 그것으로 충분했고 완전하다고 느꼈던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려고 읽었던 순간순간이 좋았다. 물론 내가 리즈와 비슷하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인생의 패러다임을 바꾼 히어로와 만날 수 있었던 리즈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누구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고, 저축을 더 하기 위해 일을 더했지만 그럼에도 괜찮을 수 있었던 히어로와의 만남을 가진다는 것. 그런 만남은 진짜 제대로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까.
《나의 마지막 히어로》 뒤에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가 나눈 대담이 있다. 꼭 소설을 다 읽고 이 대담을 읽었으면 좋겠다. 오롯이 소설의 감동을 느낀 후에 다른 사람과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소설을 더 즐겁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Don't lose your grip on the dream of the past, you must fight just to the keep them alive ……
(지난날의 꿈을 놓지 마, 그 꿈을 생생히 간직하며 싸워나가야 해)
《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중 <록키3> 주제곡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