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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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했다.


『디 아워스』의 본문을 들어가기도 전에 만난 저자 마이클 커닝햄의 말이 훅 마음에 박혔기 때문이다.



"훌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첫사랑과 같다. 나는 이 말이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읽은 《델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사랑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읽었던 어떤 책보다 더 농밀하고 내밀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델러웨이 부인》. 굉장히 쉽지 않은 책이다. 읽었지만, 리뷰를 남길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 책에서 첫사랑보다 더 강렬함을 느꼈다니. 『디 아워스』가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씨실과 날실로 교차된 듯 얽혀진 세 여자의 이야기 덕에 조금씩 풀어졌다. 완전히 느슨해진 건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델러웨이 부인》의 저자 버지니아 울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있지만, 정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해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는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인지는 오로지 그녀만 아는 영원한 비밀일 것이다. 『디 아워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소설 《델러웨이 부인》을 좋아했던 한 사람(브라운 부인)과 그녀의 《델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델러웨이 부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클러리서(델러웨이 부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세 사람은 다른 시대에 살았고,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1920년대 런던에 살았고, 누군가는 1950년대 로스앤젤레스에 살았고, 누군가는 1990년대 뉴욕에 살았다. 하지만 그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세 인물의 공통점. 바로, 《델러웨이 부인》이었다. (《세월》과 연관되어 있지만, 소설에서 그 연관성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만큼 《델러웨이 부인》이 이 소설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좋아하는 세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그래도 시간들이 남아 있어, 그렇지 않아? 하나의 시간, 그러고 나면 또 그런 시간. 그 시간들을 당신이 다 견뎌낸다고 해도 또 그런 시간이 있어. 세상에, 또 그런 시간이라니 지긋지긋해."
"당신은 지금도 좋은 날을 보내고 있어. 당신도 알잖아."



하루라는 시간은 짧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굉장히 많은 생각과 감정이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고. 그 생각과 감정에 생을 살고 싶은 욕구와 생을 끊어내고 싶은 죽음의 충동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듯 보인다. 세 사람 모두 살고 싶은 욕망이 크지만 동시에 죽음에 대한 충동도 그만큼 크다. 두 가지 충동을 하루라는 시간 동안, 세 사람의 감정 변화를 통해 표현해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디 아워스』는 긴장감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담담하게 느껴졌다. 삶을 살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과 그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파괴적 본능인 타나토스적 욕망이 소설에서 담담하게 표현하다니. 극렬한 감정적 파형을 언어로 표현해도 될 텐데. 그렇지 않았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에 대하여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지 않고 최대한 자세히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에는 충동이 불러오는 그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함이 서려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 이유는 세 인물이 자신의 감정적 변화를 숨김없이 표현하지만 자기 객관성을 유지했기 때문과, 다른 사람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정적 동요는 소설 속에 있다. 행동을 유발하는 감정은 시시각각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달라진다. 때로는 런던으로 조용히 떠나올 만큼 강렬한 충동으로 나타나지만, 어느 순간 기차표를 가슴에 숨긴 채 그 충동을 삼키기도 한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심정으로 주방을 뛰쳐나갔다가 다시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되돌아온다. 그런데, 그 극적인 행동에 대하여 소설은 거리를 둔다. 독특했다.


인물들의 감정묘사만 담담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이 품고 있는 세계의 담론은 굉장히 뜨거운 주제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 에이즈, 히피, 집착에 가까운 사랑 등. 일상 혹은 하루를 떠올렸을 때 보편적으로 생각나는 주제는 아니다. 편안한 일상보다, 자극적인 특별한 하루에 가까운 주제다. 흥미로운 건 그 주제에 대한 소설의 접근 방법이 매우 부드러웠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의 일상과 어느 하루에 미끄러져 들어올 수 있다는 듯이. 참 편안하게 이 소설은 풀어냈다. 각 인물들의 생각 속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듯 느껴졌다. 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주제들의 뜨거운 정도가 세 주인공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루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하고 클러리서는 생각한다.


… (중략) …


위로할 거라곤 우리 삶이, 그 모든 역경과 기대를 넘어선 우리 삶이 활짝 피어나 상상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어쩌면 아이들까지도) 그런 시간 뒤에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 암울하고 힘든 시간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도시를, 아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그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시간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여전히 『디 아워스』의 저자가 《델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첫사랑보다 강렬함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첫사랑과 닮은 강렬한 소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시도와 그 결과물 자체가 좋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의 순간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버지니아 울프라는 실제 인물이 아닌, 클러리서란 자신이 만든 인물로 이야기를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클러리서의 시간이 70년 전 울프 부인의 시간과 이어진 듯 보이는 구조도 좋았다. 물론 그 이어짐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하루를 마친다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그 하루를 견디듯 버티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 즐기기도 한다 혹은 마친 줄도 모르고 지나가버린 시간을 허무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며, 그 행동과 생각 속에는 다양한 삶에 대한 충동이 존재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충동에서 다음 하루를 기대하게 만드는 건, 결국 나로 살 수 있는 온전히 나를 위한 하루다. 이 하루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싶은 소설이 『디 아워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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