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평점 :
이 서평에는 거짓말이 하나 담겨 있습니다. 그 거짓말이 무엇인지 생각할 겸 서지 검색도 책을 이곳 저곳 들춰보지 않고 첫 장부터 차례로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 거짓말이 주는 여운을 몸소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밀을 알고 읽었지만, 비밀을 모른채 읽는 다면 더 즐거운 읽기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 소설가들이 모였다. 기묘하고 오묘한 느낌이 감도는 소설집을 완성하기 위해. 《메리 수를 죽이고》는 여러 작가들의 소설을 모은 소설집이다. 오쓰이치, 나카다 에이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 아다치 히로타카의 글이 모여 7편의 단편 소설과 일곱 편의 짧은 작품 해설이 담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나 자신의 장기를 살려 자신의 색깔을 입힌 소설을 한편 혹은 두 편씩 담았고, 한 소설가는 작가와 그 소설에 대한 곁드림 이야기를 짧은 글로 정리했다. 일곱 편의 단편이 각각 따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마다 가지고 있는 우정을 다룬 이야기, 나를 돌아보는 이야기, 두려움을 느끼는 이야기, 작가로써 초심을 말하는 이야기, 동일본 대지진이란 비극을 다룬 이야기, 으스스한 괴담까지. 일상과 한발 떨어져 있지만, 안개가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무진(이청준 소설가의 《무진기행》의 무대)과 같은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호기심 어린 상상과 함께 소설을 읽었다. 《메리 수를 죽이고》는 그런 기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각 이야기는 저마다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소설이지만, 한편 한편 이야기는 몰입감이 높은 이색적인 소설이다. 이야기의 순서대로 천천히 읽다보면, 점점 마음이 두근두근 고조되었다가 오묘함으로 끝나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소설은 각 주인공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들려주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생각 한 자락을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로 시작해 10대가 저지른 범죄, 학교에서 일어난 소동을 다루다, 최근 일본인이 느꼈던 큰 슬픔을 풀어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고독한 듯 무서운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단편 하나하나 순서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을 끊지 않고 한 호흡으로 읽은 난 꽤 좋은 순서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소설 안에 담긴 기승전결이 소설집의 구성에도 녹아든듯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이 소설집에 등장한 작가 중 아는 작가가 단 한명도 없었다. 원래 어떤 소설을 쓰는 작가인지, 어떤 소재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적어도 나에게는 소설가와 해설을 쓴 소설가가 더한 정보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는 소설가들이었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뒤, 소설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 것도 《메리 수를 죽이고》를 읽는 재미를 한껏 높여 주었다.
오쓰이치가 쓴 <염소자리 친구> 나카타 에이이치의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메리 수 죽이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3편 모두 10대, 학창 시절 이야기가 녹아져 있는 소설이다. <염소자리 친구>와 <소년 무나카타의 만년필 사건>은 모두 동급생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일과 닿아 있고 이를 풀어주려는 이야기 구조에서 꽤나 큰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중학교 때 재미있게 읽었던 청소년 문고 소설을 압축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소설집에서 가장 긴 소설이었던 <염소자리 친구>의 소설 말미에 느껴지는 여운은 마음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울림까지 있었다.
눈앞의 우유 팩에 그녀가 토해낸 숨이 지금도 가득 차 있다.
살았던 마지막 날, 사라지기 몇 시간 전의, 그녀의 숨결이.
_ <염소자리 친구> 마지막 두 문장.
<메리 수 죽이기>는 누군가가 만든 세계에서 2차 창작을 즐겨하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1차 창작의 세계로 나아가기 까지의 과정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창작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의 공존과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고 몰입감 있게 쓸 수 있다니. <메리 수 죽이기>가 묘하게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목차와 책 제목을 다시 보았다. 《메리 수를 죽이고》라는 제목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다시 제목을 보았을 때 그 이상하게 걸렸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소설집 전체에 흐르던 낯선 느낌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글씨를 쓴다. 언어를 풀어낸다. 기록한 글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왠지 거울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쑥스러웠다.
_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중에.
각각의 단편의 분위기는 한결같이 차분하다. 들뜨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음침함으로 빠져들지도 않는다. 소설들이 가진 특유의 톤 덕분에 이야기에 독자는 한껏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작가들이 모여 쓴 《메리 수를 죽이고》를 읽으며, 한명의 작가가 쓴 소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짧은 이야기마다 작가가 담고 싶었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안개 속에서 옷이 살짝 젖어들어가듯 소설 속 인물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읽으며 내 생각도 소설 속 주제에 젖어들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줄 수도 있고. 다른 삶을 펼쳐낼 기회가 어떻게 찾아올 수 있는지 곱씹어보았다. 현실에는 없을 법한 상상 속 이야기들이지만 그 우연과 감동 그리고 음침한 이야기가 한 권에 어우러져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며, 꽤 괜찮은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이어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