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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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내내 놀랐다. "이것은 읽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라는 문구와 딱 맞아떨어져서. 『바르도의 링컨』은 경험하는 책이다. 정확하게 어떤 독특한 읽기 경험으로 이끄는 책이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죽음인지 그 불분명함을 어느 무덤가 이야기로 구현해냈다.


“완전히 독창적인 이 소설의 구성과 스타일은 위트 있고 지적이며 지극히 감동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어린 아들이 다다른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고통받는, 그리고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영혼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생생하고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를 창조해낸다. 『바르도의 링컨』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를 재치 있게 활용하며 타인에 대한 공감의 의미와 경험을 탐구하게 한다.”

_롤라 영(2017년 맨부커상 심사위원장)


『바르도의 링컨』은 2017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수상작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의 언어로 소설을 이야기했는데, 실제 소설은 이 말에 담긴 의미 이상으로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소설은 한 실화를 보티브로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쓴 장편 소설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년 뒤에 사랑하는 아들 윌리를 잃는다. 열 한 살이었던 어린 아들을 장티푸스로 잃은 후, 그는 아들의 무덤에 찾아가 시산을 안고 오열한 이야기를 듣고 저자는 영감을 받아, 『바르도의 링컨』을 쓴다. 소설의 핵심 줄거리에는 링컨 부자가 놓여 있다. 열 한 살에 맞이한 죽음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아들과 아들을 떠나보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이면서,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묘지를 떠다니는 영혼들의 마음과 생각을 연다.


바르도의 풍광이 어떤지, 각 영혼들이 어떤 모습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소설은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이 빠진 자리는 오로지 영혼들의 말과 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영혼들의 모습은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과 다름 없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육체일 뿐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왔지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삶과 죽음 중간에 놓여 있는 어떤 세계다. 그 세계를 살아 있는 링컨은 보지 못하지만, 바르도에 머무는 이들은 링컨을 볼 수 있다. 아들의 죽음을 사무치게 가슴 아파하는 한 대통령이자, 한 아버지를.


죽음. 맞이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지만,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를 비롯해 바르도에 영혼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목소리로 두 부자의 이야기가 전하고, 저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토로한다. 이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바르도의 링컨』은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경험을 준다. 쏜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 3부처럼 죽음 이후 무덤가에서 나누는 대화를 소설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각 인물들의 목소리들만으로 소설은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다. 마치 교향곡을 듣는 듯 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바르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삶에 대한 미련이라고 할 수 있고, 생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우리말로 '한(恨)'처럼 적절한 표현도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영혼의 수 만큼 많았다.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가 있고,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사람, 질병으로 죽은 이, 생의 대부분을 나쁜 짓을 했던 사람 등.. 바르도의 영혼은 토마스 목사의 표현을 빌려, "물질빛피어오르는 현상(내가 묘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경험)과 연결된, 뼈- 오싹하는 불소리의 원인이자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내부로부터의) 관찰자가 되어"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완전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영혼의 생각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바로 '링컨'의 방문이었다.


아이를 잃었을 때 부모가 자신에게 가할 수 있는 고통은 끝이 없다. 사랑을 할 때, 우리 사랑의 대상은 작고 약하고 취약하며, 보호를 해달라고 우리를,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런 보호가 실패하면, 무슨 위로(무슨 정당화, 무슨 방어)가 가능하겠는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의심이 곪았을 것이다.

하나의 의심을 처리하면, 다른 그리고 또다른 의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밀런드, 앞의 글

『바르도의 링컨』, 342쪽


대통령으로 링컨을 욕하기도 하고, 어린 아들을 곁에서 떠나보낸 아버지 링컨을 애도하기도 하던 이들은 자신의 생각 혹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순간과 마주한다. 문지방과 같은 바르도라는 공간에 있는 자신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세계 앞에 서서 지나온 길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나아갈 곳이 두려워 차마 걸음을 내딛지 못하던 그 심정을 작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다층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곱씹으며, 저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물질빛피어나는 듯한 죽음이 어떻게 자신에게 왔었는지 고백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 역시 사람이 아닌 '영혼'이라는 걸. 월리 링컨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바르도의 링컨』의 로저 베빈스 3세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가기전에, 소중한 친구들이여, 여러분에게 이걸 보내요, 이 순간적인 생각-분출 속에서, 시간이 느려지다 멈추는 곳, 우리가 단 한순간에 영원을 살 수도 있는 곳에서." 이 표현만큼 바르도를 절묘하게 표현한 곳이 없었다. 바르도라는 기묘한 공간에서 진정한 죽음을 깨닫는 이들의 고백은 아직 죽음은 커녕, 바르도에도 닿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죽음으로 닿지 못하게 만드는지 살피다보면, 삶을 살아가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동포의 잠든 집들을 지나, 앞으로, 밤 속으로 달려 들어갔네.


바르도를 찰나로 여기고, 죽음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오늘을 난 살고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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