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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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키』는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소설이다. 그곳은 바로 클리블랜드 퍼스트 뱅크다.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은밀한 비밀을 간직한 이 은행은 1978년 12월에 갑자기 문을 닫는다. 주인공 베아트리스는 파산 직전의 은행에 고용되어 그 마지막을 목격한다. 20년 후 1998년 8월, 또 다른 주인공 아이리는 폐허가 된 은행의 설계도를 담당하며, 잠들어 있던 클리블랜드 은행에 들어간다. 은행의 비밀을 밝혀치며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베아트리스와 은행의 비밀을 파헤치며 과거를 살펴보는 아이리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베아트리스가 되어, 때로는 아이리스가 되어 과연 은행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비밀'에만 집중해 책을 읽었다. 그 비밀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야기가 비밀을 더욱 비밀스럽게 만들고 있다. 덕분에 600쪽이 넘는 분량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왜 데드키라고 부르는 거죠?" 아이리스가 끝까지 물었다.
"대여금고가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고 잠겨 있으면, 우린 '죽었다'고 말해요. 대여금고가 죽으면, 그걸 비우고 다른 대여자를 받아야 하죠. 우린 데드키로 죽어버린 대여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지금은 드릴로 틀에 구멍을 뚫고, 틀 전체를 몽땅 갈아치우지만. 짐작하겠지만, 금전적으로 엄청난 낭비죠."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데드키』, 457-458쪽


은행의 비밀이 집중된 곳은 바로, 대여 금고다. 『해리 포터』에서 부모님이 해리에게 남겨둔 유산을 남겨둔 곳과 같은데. 현실적인 『데드키』에선,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대여금고가 전해지지 않고, 그대로 죽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클리블랜드 퍼스트 뱅크에는 수많은 대여금고가 있었고, 대부분의 대여금고는 잠들어버렸다. 그 잠든 대여금고에 감추고 있는 것이 바로 은행이 감추려했던 비밀이자, 베아트리스가 알고자 했던 진실과 아이리스가 파헤쳤던 금기였다. 스릴러 이야기가 그러하듯, 모르고 지나갔으면 괜찮았을 사실은 절대로 알아서는 안되는 금기였다. 그 금기를 건드린 두 사람은 위험천만한 일들을 겪는다. 작은 술집 바텐더 카마이클이 건넨 충고, "묘지에서 절대로 훔치지 마라. 귀신들의 잠을 깨울 수도 있으니까."라는 아이리스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에게도 충격을 안겨준다. 그 충격은 어떤 사람은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의외성으로 다가왔다.


"우린 하나님을 믿노라. 열쇠는…… 내부 조력자를 잃다? ……두더지 사냥 실패…… 시장 놈아, 엿이나 먹어라……. 예금계좌를 옮겨라……. 테디와 짐…… 휴가에서 돌아오지 말라고 맥스에게 말해라……. 은행은 기록이 있을 때만 좋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데드키』, 422쪽


위에 인용한 베아트리스가 남긴 의미심장한 글은 베아트리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남긴 흔적이었다. 어린 나이에 좀처럼 감당하기 벅찬 일들과 직면했던 베아트리스는 한 달도 안 되어 은행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밀을 거머쥔다. 그리고 그 비밀은 자신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그 흔적을 암호처럼 해독한 아이리스는 그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모든 비밀을 서서히 앍아가는 독자인 난, 그 너머에 담긴 철학적 해석을 곱씹을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해 클리블랜드 퍼스트 뱅크는 비밀을 감추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뒤, 맥스와 베아트리스가 겪었던 일들은 시간을 넘어, 아이리스에게 찾아온다.


데드키의 의미는 소설 중후반부가 지나서야 밝혀진다. 데드키는 수많은 금고의 문을 열 수 있었던 마스터키였다.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소설에 담겨 있으니 직접 확인하길 추천한다.) 비밀을 천천히 밝혀내듯,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의 탐욕의 결과물인 데드키를 노리는 세력을 한 번에 드러내지 않는다. 추상적으로 보여준 뒤 하나 둘 밝혀내는 과정은, 단조로울 수 있는 스릴러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또 주인공도 두 명으로 내세운 점도 좋았다. 은행 비서였던 베아트리스라는 인물과 함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아이리스는 건축공학기술자로, 이야기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속도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자칫 베아트리스의 이야기로 흐르면 지루했을 이야기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사실 난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많은 소설가들은 데뷔작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처음이기에 용인되는 그 '아쉬움'은 어설픔으로 보이기도 하고, 난해함으로 보이기도 하고, 투박함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난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점점 필력을 늘려나갈 작가에게 하는 격려의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드키』에서 이 수식어는 격려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찬사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탄탄한 서사와 실제 아이리스와 유사한 경험을 한 작가의 직업적 체험이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야기가 길다는 점이다. 제법 묵직한 책두께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길다고 지루하지 않았다. 긴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이끄는 작가의 솜씨가 빛을 발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심리 스릴러 소설을 많이 읽은 '스릴러 소설 전문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끝까지 결말이 궁금한 소설이었다. 조금만 짧게, 흡입력 있게 소설을 쓴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데드키』 이후에 발표한 『묻혀버린 책』과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 모두 영문으로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자랑한다. 두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장편 소설을 몰입감 있게 쓰는 작가인 듯싶다.


스릴러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나로서는 긴 호흡을 유지하는 스릴러를 읽기란 쉽지 않았다. 두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을 적절하게 이용해 은행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을 읽는 즐거움이 컸다. 팽팽한 초중반부 긴장감이 후반부 결론에 이르러 생각보다 쉽게 풀려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보다 몰입감 있게 읽는 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흥미로운 사건이 펼쳐진 1978년 그리고 1998년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로 초대(?)한 『데드키』 덕에 지루했을 뻔한 하루가 스릴감 있게 끝났다. 그 점,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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