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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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마지막은 무거운 단어다. 보통은 후련함보다 아쉬움을 한가득 머금고 있어 참 무겁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나에게 무거운 작가다.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정확하게 3번 대출하였고, 3번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하였다. 아쉬움을 넘어 찝찝함을 한가득 머금게 만든 소설을 쓴 소설가다.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 나왔다. 굉장히 무거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워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뜬금없지만 마지막을 이토록 가볍게 마무리한 움베르토 에코, 역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정보의 양이 무궁무진하며, 그 정보가 전해지는 속도가 상상 그 이상인 이 때,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딱 한 가지를 꼽을 수 없지만, 뉴스는 꼭 들어가지 않을까. 특히 언론 매체가 전하는 뉴스가 가진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정보에 '읽을만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니까.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괜찮은 것을 구분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고, 이는 더 나아가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편집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 생각 속에 감정을 밀어 넣을 수 있기에 언론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정보의 양이 무궁무진하고 빠르게 전할 수 있는 때, 이를 편집하여 내는 언론의 힘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있다.) 언론 자체에 대해서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만, 언론이 전하는 소식에는 열정을 내비치고 때때로 광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뉴스를 읽으며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고, 나눔과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불어넣기 때문에 나쁜 것도, 긍정적인 감정을 불어넣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뉴스를 읽고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 동요를 동시에 경험한다. 


언론은 자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 역시 알고 있다. 정치적 큰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과 연예면 스캔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보면 모두가 비슷한 음모론을 떠올리지만, 연예면 소식을 클릭한다. 이처럼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거짓에 현혹되고, 만들어진 여론에 따라 생각이 움직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제0호』는 '누가 왜 가짜 뉴스(거짓)를 만드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가짜 뉴스(거짓)를 믿는가'라는 주제 의식을 담았다. 『제0호』는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인에게 저널리즘이란 무엇이며, 언론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질문하는 책이다. 소설의 배경은 1992년 이탈리아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초대형 정경유착 스캔들이 터지며 1천여 명의 정재계 인사가 유죄판결을 받는 등 '마니 풀리테'라 불리는 대대적인 부패 척결운동이 일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이탈리아는 한걸음 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후의 일은 생략한 채, 1992년이란 시간을 무대를 두고 이상한 신문사의 이상한 프로젝트 <제0호>를 둘러싼 일을 쓴 『제0호』. 현실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교한 글은 마치 일상을 그리고 있는 듯 읽는 이의 눈을 이끈다.



신문도 거짓말을 하고 역사학자들도 거짓말을 해. 오늘날에는 텔레비전도 거짓말을 해.



황색언론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 움베르토 에코는 거침없이 <제0호> 프로젝트 현장을 보여준다. 프로젝트를 위해 모인 6명의 기자와 편집부 주필과 그 주필을 보좌하는 대필 작가는 절대로 발행되지 않을 신문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일지 의심스럽지만, 절묘하게 실제로 있었던 일을 비틀어 넣는 움베르토 에코의 글은 풍자 그 자체다. jtbc <비정상회담> 출연자 알베르토 몬디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들었던 베를루스코니가 각주에 등장하는 것을 보며 이탈리아 국민들은 어떻게 이 소설을 읽었을지 궁금해질 만큼 그의 소설에는 이탈리아의 오랜 과거, 1992년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정치·사회적 사건이 녹아져 있다. 저자의 다른 작품에서 등장한 바 있는 음모론과 언론이 만나 만들어진 거짓과 침묵함으로써 발생하는 또 다른 거짓으로 가짜 뉴스가 탄생할 수 있는 경로를 보여준다. 매 장마다 새로운 뉴스 꼭지와 그 꼭지를 거짓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고 놀랐다. 하나하나의 거짓과 거짓말들이 하나로 모여 <제0호>가 되었을 때 만들 또 다른 거짓의 영향력까지 계산해 넣은 저자의 치밀함에 놀랐다. 발간되지 않아 다행인 <제0호>의 모습이 또 한편으론 궁금했다. 그 과정을 긴장감 있게, 재미있게 그리고 적절한 생각의 울림을 주는 방법으로 전하는 것을 보면,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작가로써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뉴스란 새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요.」 내가 대꾸했다. 「우리는 뉴스를 재활용하면 됩니다.」



에코는 굳은 결심으로, 소설을 통해 '저널리즘'과 '그 저널리즘을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란 꽤 어두운 이면을 탐구한 듯싶다. 아마도 이탈리아 정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라는 통렬한 아픔을 에너지 삼아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가짜 뉴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가짓 수를 소설에 다 담은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저널리스트로 약 50년간 지냈던 경험을 소설에 충분히 녹여냈다. 하나로 묶으면 언론이 거짓말을 하는 방법이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침묵함으로써 거짓을 전하는 법, 사실과 의견을 교묘하게 배치하는 방법, 뉴스들을 이용해 의미가 담긴 뉴스를 만드는 방법, 감정을 심어 넣는 법, 소문을 넌지시 말하는 방법, 뉴스를 새롭게 활용하는 방법 등을 읽다 보면, 저널리즘의 그림자에 대해 꽤 많은 걸 얻어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많은 걸 큰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그가 쓴 어느 소설보다, 가장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이다. 마치 소설 속 언론인이 대중에게 전하는 글을 쓰듯. 그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몹시 뻣뻣하고 어려워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데 꽤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그의 또 다른 소설 『장미의 이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술술 읽힌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저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지는 법이죠. 자기가 알 것은 다 안다는 식으로 무게를 잡을 필요가 없어요.  『제0호』는 내 소설들 가운데 학식을 가장 적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전 소설들이 말러의 교향곡들이라면, 이 소설은 재즈에 더 가깝죠."



이미 글로 다양한 문학 세계를 집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힘을 뺀 것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언어로 묵직하게 생각과 마음을 누르는 힘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보인 친절함은 누구나 생각해야 할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을 여는 좋은 키가 되었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선입견을 벗겨낸 가벼운 마지막 소설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가치가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제0호』에서도 여전히 움베르토 에코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클래식화"라는 더 어려운 도전을 했고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도전이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증거 중 하나가 내가 아닐까. 그의 마지막 소설을 처음으로 완독했으니.


이야기의 품격을 유지하며, 그 독자층을 한층 넓힌 그의 마지막 소설이었다.  나에게 『제0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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