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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평점 :
『애도일기』는 1977년 10월 25일,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여의고 그다음 날부터 쓴 일기다. 노트를 사등분해서 쓴 기록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가 손수 마무리한 책이 아니다." 언어학과 비평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보았을 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란 개념을 통해 독자의 주체적 읽기와 비평의 시대를 본격화 한 사람이다. 하지만 『애도일기』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 직전부터 서서히 자신을 잠식해온 슬픔이란 감정에 빠진 한 사람일 뿐이다. 어떤 감정도 침식할 틈을 내어주지 않는 슬픔에 깊이 들어간 롤랑 바르트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롤랑 바르트의 글 속에서 서문을 쓴 나탈리 레제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글들은 바르트가 쓰고자 했을 어떤 책의 가정들, 그 작품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그 작품에게 빛을 던져주고 있는 텍스트이다."라고.
롤랑 바르트의 지극히 사적엔 텍스트들을 모아둔 『애도일기』에 대하여 저자 스스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메모를 하면서, 내면의 진부함에게 나는 나 자신을 모두 주어버린다." 자신의 내면 속에 자리한 감정을 짧은 문장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그의 글은 144자로 함축한 트위터 문장과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몇몇 글들은 144자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글에 담긴 감정이 슬픔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울음을 꾹꾹 참아 쓴 듯, 그의 글은 의외로 담담하다. 그리고 아련하다.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은 듯, 어머니의 존재가 사라진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기를 한가득 머물고 있지만, 밝게 빛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몇 문장이 읽는 이의 마음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든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그것도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사람은 그 슬픔에서 얼마나 헤어나기 힘든지, 자신이 슬픔에 놓여있음을 알지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갈피조차 잡기 힘듦을 알고 있다. 그 격렬한 슬픔의 순간순간을 롤랑 바르트의 시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애도일기』가 바로 그 책이다. 슬픔의 한 가운데에 놓인, 자신을 염려하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은 무기력해 보이지 않는다. 슬픔이란 감정을 깊이 파고드는 섬세한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한 권의 책을 통해 그의 슬픔을 읽지만, 긴 기간 하루하루 그 슬픔을 들여다보았을 그의 감정은 고아하다.
그가 말한 슬픔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오던 것들이 서서히 삶의 일부처럼 살아 숨쉬기까지. '슬픔' 그리고 '애도'라는 말로 정의한 단어의 의미는 여러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상상한 슬픔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마망의 죽음을 견뎌내게 하는 무엇. 그것은 일종의 자유의 향유와 같은 것을 닮았다."라는 글에서처럼 슬픔은 과거의 나를 전복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혹은 "슬픔은 잔인한 영역이다. 그 안에서 나는 불안마저 느끼지 못한다."와 같이 과거의 나에 순응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과거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지만, 그 일에 서서히 습관이 되면, 당신은 차츰 감지하게 될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 당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그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당신의 곁에, 그 어떤 빈 곳도 남기지 않고 다시 존재하게 도리 거라는 걸 말이죠.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아직 불가능합니다. 침착하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당신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그러면서 당신을 어느 정도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수수께끼 같은 힘이 찾아올 때까지.
후속 일기를 쓸 때쯤 그는 과거의 글에서 슬픔을 다시금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슬픔은 익숙함으로 나아간다. 자신만이 아는 아픔의 리듬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는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슬픔을 통해 그는 슬픔이 이끄는 또 다른 감정의 끝에 이른다. "애도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서 만나게 하려는 것, 그것이 이 깨어남이 아닐까?" 슬픔을 통해 그가 눈뜬 것이 무엇인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그가 그 텍스트 뒤에 둔 것은 그 순간의 그만이 알고, 우리는 그의 글에서 또 다른 것을 읽어낸다. 그가 어머니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더 긴 시간 동안 슬픔에 빠져 있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텍스트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다. 그것이 "독자의 탄생"을 열은 롤랑 바르트가 바라는 바가 아닐까. 그가 의도치 않았지만, 세상에 공개된 『애도일기』를 보고 있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내가 『애도일기』에서 발견한 인상 깊은 문장은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였다. 쉽게 우리는 슬픔에 공감한다고 말하고, 그의 글에 내가 알고 있는 슬픔을 투사했다. 그가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그의 감정에 대하여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글에서 내가 알고 있는 슬픔의 감정을 떠올릴 뿐이다. 그것만으로 『애도일기』는 나에게 유의미한 책이었다. "일말의 움직임도 없는 정지 상태"라고 말한 그의 슬픔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고, "무엇의 결핍되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상처받아 사랑의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어렴풋 닿는 듯싶었다.
누가 알겠는가? 그 어떤 귀중한 것이 이 메모들 안에 들어 있을지.
그의 이 텍스트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슬픔에 깊이 잠식했을 때, 내가 찾고 싶은 문장이 가득 담겨 있는 『애도일기』 는 충분히 귀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