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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의 비밀 편지
스텐 나돌니 지음, 이지윤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0월
평점 :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UPLOAD/user/g/p/gps5059/tmp/1_1.jpg)
《마틸다의 비밀편지》는 한 할아버지 마법사가 사랑하는 손녀에게 보내는 열두 통의 편지로 되어 있다. 2030년 이후, 그의 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전해지기로 된 편지는 12년 먼저 세상에 공개되었다. 파흐로크 할아버지가 마법사의 신분을 숨기고 보냈던 긴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는 그의 손녀 마틸다가 아니어도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편지처럼 시공을 넘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좋은 매체는 별로 없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세대를 넘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열두 통의 편지에 압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 파흐로크는 1900년대 초 독일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마법사로 불행하고 음울한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랬기에 사랑하는 손녀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를 전하기에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 상황과 그 마음을 헤아리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쪽이 고요히 가라앉아 생각에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법사의 성장은 골 깊은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단다. 처음에는 낮은 언덕을 넘어 작은 산을 오르다 높은 봉우리로 갈수록 점점 더 가파르고 힘들어지지. 하지만 어느 순간 꼭대기에 오르면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화려한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단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산을 내려오는 일뿐이야. _ 《마틸다의 비밀편지》 120쪽
이 책에선 마법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고충이 그의 글 속에 더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었던 일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라는 참혹한 학살이었다. 마법사였던 그는 막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처럼 '완벽함'이 그에게도 없었다. 그는 스승의 죽음, 사랑하는 이웃의 죽음, 친구라고 믿었던 마법사가 잔인하게 변한 모든 것을 모두 목격한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마법사로 산다는 건, 특별한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걸 전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에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방법'을 담았다. 물론 그 방법은 마법사이기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너무나 냉혹해 실천하기 힘겨웠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움직임 앞에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더 나은 미래를 일구려 애썼다. 마법사인 그의 능력을 발휘해서 말이다.
파흐로크 할아버지가 겪은 비극, 1930년대 독일에서 살았던 이들이 목도한 일(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학살)은 다시는 반복되면 안되지만,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그렇기에 그는 '역사'로만 남겨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비극이 다시는 오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파흐로크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통해 자신의 기억이 개개인의 삶에 살아 숨쉬길 바라며.
그는 자신의 노력이 삶에서 모두 좋은 결과로 보상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시도는 비밀 편지가 마틸다에게 남겨짐으로써 절반뿐인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장, 2032년에 미래에서 온 편지인 '발데마르 3세의 헌사'에서 또 다른 반전이 펼쳐진다.
"어떤 세대의 마법사들은 위대해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신들 또한 그 세대가 한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마법사의 마지막 세대가 될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편지를 모두 읽은 마틸다의 말을 인용한 발데마르 3세는 "모든 마법은 이 세상 좋은 곳으로 달려나가는 작은 움직임을 꿈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좋은 마법사의 행운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행운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진짜 마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제동 장치와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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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틸다, 우리 모두는 삶에 머물고 싶어 하게 마련이야. 그래서 재앙이나 사고에서 살아남거나 대량 학살에 희생되지 않는 것을 기쁘게 여긴단다. 적어도 누군가 물어보면 우리는 살아남아 기쁘다고 대답했지. 명쾌하게 말하는 속마음에는 우리가 침착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신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훼손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기대가 섞여 있어. _ 《마틸다의 비밀편지》 218-219쪽
그렇다면, 아직 마법사가 아닌 우리에게 《마틸다의 비밀편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이 훼손되지 않기를 원한다. 하지만 슈나이데바인과 같은 마법사가 힘을 언제든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비극이 엄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이전 세대가 겪은 비극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파흐로크 할아버지는 비밀 편지를 마틸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남겼다. 파흐로크와 같은 마법사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 삶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저마다 평범한 일상을 감당해야 할 몫이 있음을 상기하기 위해서. 각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견뎌야 할 무게는 모두 다르겠지만, 어느 누구도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그래서 때때로 서로의 삶을 함께 지지해주고 지탱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그는 열두 통의 편지를 썼다.
시공을 넘어 이어지길 바랐던 그의 삶이 《마틸다의 비밀편지》에 담겨 있었다.
그 삶이 마틸다에게, 우리에게 어떻게 이어져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