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날은 전부 휴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기분 좋은 가을의 기온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가을 방학 같은 소설! 『남은 날은 전부 휴가』를 읽고 든 생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유일하게 방학이 없는 계절. 바로 가을이다. 하지만 가을만큼 방학과 쉼이 필요한 계절도 없다. 더위에서 추위로 변하는 계절이라 더더욱 쉼이 고픈 계절이다. 게다가 단풍 구경도 가야 하니. 정말 가을은 쉼이 필요하다. 물론 기분 좋은 추석 연휴가 있지만. 휴식이란 길면 길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방학은 더 이상 없는 어른들에게 휴가가 더더욱 필요하다. 원하는 가을방학이나, 가을 휴가는 없지만 대신 읽은 소설 『남은 날은 전부 휴가』는 유쾌하고 즐겁고 또 감동을 안겨주며 쉼을 주었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미 익은 이름 '이사카 코타로'. 저자는 사회 문제를 글 속에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녹아내는 솜씨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남은 날은 전부 휴가』에서도 여전하다. 오히려 더 가벼워진 느낌이랄까. 가족해체, 스토커, 아동학대, 협박, 복수 등 잔인하고 무서울 수 있는 소재를 어떻게 이렇게 풀어낼 생각을 했을까 싶어 놀랐다. 

"뭐랄까, 자네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리는걸"

『남은 날은 전부 휴가』는  평균적인, 어쩌면 평균적인 삶조차 벅찬 사람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전환점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자신 역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한 남자다.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그렇다고 거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는 걸까 싶지만, 그는 꽤나 멋진 인생을 살아간다. 물론 그가 인생의 매 순간을 멋지게 사는 건 아니다. 때때로 이따금 멋지게 살아간다. 그런데, 그 어쩌다 한 번이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정을 바꾸어 놓는다. 그 순간마다 그는 정교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고들고 적절한 때에 다시 나온다. 마냥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아니고, 무심하게 다가선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그는, 역시 나쁜 듯 보이지만 좋은 사람이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소설은 5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다섯 편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미조쿠지와 오카다의 삶이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두 사람의 인생은 이사카 고타로의 장기인 '퍼즐식 구성과 복선'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뒤에 이야기를 짜잔 하고 멋지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뭉클한 감동을 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할지도 모르지만, "어른들의 성가신 오지랖"이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은 최악이지만 그 인간이 최악인 건 아니니까."라는 말을 하며 아동학대를 당하는 아이에게 섣부르게 아버지를 욕하거나 도망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인 오카다 역시 아동학대를 버텨야 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는 말한다. 
"안심해, 나도 폭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그런 인간은 맞아봐야 화만 낼 뿐이야. 미조구치 씨도 말했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으로 '학대했다가는 큰일 난다'는 생각을 심어줘야지. 그거 알아? 그런 부모는 자신이 완벽한 줄 착각하고 있어. 자신이 가장 옳다고 말이야." 그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 선명해서 놀랐고, 그 뒤에 내놓은 해결안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소설로 확인해보길 권한다.) 폭력을 가하는 아빠에서 폭력을 휘두르면 어떤 결과가 올지를 아는 아빠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마치 일본 드라마 <장미가 없는 꽃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이를 구해내는 그런 장면 말이다. 물론, 아이는 누가 자신의 아버지를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적당히 들어갔다, 눈치채지 못하게 빠져나오는 솜씨가 참 좋았다. 

"다 그런 거야." 어머니는 말했지만 그 '다 그런 거'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서 종종, 그 영화를 떠올렸다.
연인을 잃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내뱉은 대사다.
"슬픔을 잊어야만 했지. 나에게는 아직 남은 시간이 있었어."
그 말 그대로 나는 아직 열 살이었다. 슬픔은 잊어야만 했다. 
남은 시간이 아주 많았으니까. 


착한 사기꾼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닮아 있다. 도둑 세 명이 나미야 잡화점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편지를 쓰듯. 누군가의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줬던 미조쿠지와 오카다는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하고 있었다. 책의 카피처럼 "하찮은 인생에도 괜찮은 순간"이 찾아온다는 그 마법을 믿게 만드는 힘이 두 사람에게 있다. 무언가 대단한 위치에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건 아니다.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삶의 깊이로 누군가의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줄 수 있다. 그 깊이가 깊지도 얕지도 않아서. 그래서 두 사람의 엉뚱한 나날들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잃어서 잊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앞으로 가, 제멋대로."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수 있음을. 
무엇을 해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의 순간에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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