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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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소설을 읽고 싶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거나 어려운 주제가 담긴 소설 말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조금 덜 진지해도 괜찮은 그런 이야기 말이다. 우연히 만났다. 요즘에 좀 덜 진지하게 살고 싶은 나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년에게는 미안하지만 딱, 그런 소설이었다. 《펭귄 하이웨이》는. 좀 덜 진지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 하지만 애독자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적당한 이야기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한적한 주택가에서 펭귄을 만난 것처럼 어려운 만남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스무 살이 되기까지 3000 하고도 888일 남은 소년이 스무 살이 되기까지 3000 하고도 748일 남는 소년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140일간 있었던 "펭귄 그리고 짝사랑하는 치과 누나"와 있었던 이야기다. 그 소년의 이름인 아오야마다. 교외 한적한 주택에서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아오야마에게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생겼다. 바로, 주택가에 갑자기 등장한 "펭귄 무리"가 왜 왔는지다. 하지만 펭귄 무리가 등장한 이유를 밝혀내기도 전에, 펭귄들이 걸었던 길, "펭귄 하이웨이"를 걷다 알게 된 치과 누나, 마을 뒤편의 재버워크 숲 그리고 이상한 생물들 등 연구, 실험해야 할 것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하지만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며 어제보다 더 훌륭한 나 만들기"에 집중하는 아오야마에게 포기란 없다. 결국 이 모든 걸 연구하는 '아마존 프로젝트'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따로 또 같이 연구할 친구 하마모토와 우치다와 매우 보기 드문 문제에 다가간다.


세계의 끝이나 콜라 캔이 펭귄으로 변하는 건 그리 익숙한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 낯선 설정이 펼쳐진 공간은 꽤나 익숙하다. 몇 십 년 전이나, 몇 십 년 후가 아니라, 올여름 어느 작은 마을이 《펭귄 하이웨이》의 무대다. 별일 없는 것이 당연한 그런 작은 (시골) 마을이야말로 별일 일어나기 딱 좋다는 걸 증명하듯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동물과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작가가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아오야마와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다듬는 솜씨를 보며 읽을 이야기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웠다.


"세계의 끝은 멀리 있지 않아."
"그럴까요?
"그렇고말고. 세계의 끝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웜홀도 그렇지 않을까? 너랑 아빠 사이에 있는 이 테이블 위에 실은 웜홀이 이미 출현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어."


영화 <너의 이름은> 이후로 부쩍 자주 등장하는 시공의 세계가 《펭귄 하이웨이》에서도 등장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애늙은이 소년과 미스터리한 누나 그리고 귀여운 동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애틋함이나 절박함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움이 가득 담겨 있다. 아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선 소년의 감성이 드리워져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SF 소설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드는 아오야마의 생각은 '공상과학 소설'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나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아오야마와 아버지와 대화는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 모든 걸 궁금해하는 시선과 좀 적당히 진지하고 싶은 어른의 시선을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아오야마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아버지는 생각을 열어주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다. 꽤 멋진 아버지 캐릭터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는 프랑스로 출장을 떠난다. 기가 막힌 설정이다.


"아버지는 세상에는 해결하지 않는 게 좋은 문제도 있다고 했어요.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그런 거라면 나는 상처 입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지."
"그걸 알 것 같은 기분이에요. 하지만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나하나 들여보면 의미나 생각할 거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일본 소설 특유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점은 아쉽지만, 140일 동안 일어난 아오야마의 모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성장을 다짐하는 아오야마가 140일 동안 자란 걸 확인할 수 있었던 마지막 대목은 수미상관 기법이라 할 수 있는 깔끔한 마무리였다. 적당히 열어진 결말까지. 진지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펭귄 하이웨이》는 요즘 나에게 적당한 소설이었고, 재미있게 읽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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