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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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참 어렵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어려운 질문은 "그 책 재미있나요?"다. 여간 까다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즐겁게, 행복하게, 힘겹게, 어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읽는 나도 힘든데, 평론하는 사람은 어떨까.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겠지만, 대답하긴 더 어려울 것이다. 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이야기하지만 책의 세계에 대해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다.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타인의 슬픔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추론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평론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인 그의 평론은 '문학적'이다. 문학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낱낱이 분석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 평론은 '비평적'이지 않다. 현학적인 문장으로 뜬구름 잡는 듯한 글 대신 텍스트를 어떻게 나의 삶에 조망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그가 오랜만에 자신이 사유한 책의 세계를 엮은 '책'을 냈다. 바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후 4년 만에 출간한 산문집이다.


제목부터 매혹적이었는데, 그 안에 담겨 있는 글들은 더더욱 마음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그의 글 속에는 책에 대한 감상과 사회 현상에 대한 시평이 공존하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생각과 세상에 전하고 싶은 공적인 메시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글들이 잔뜩 실려있다. 시, 문학, 사회, 영화, 소설 장르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적은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다양한 매체의 지면을 장식한 글답게 깔끔하게 다듬어진 글도 있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을 부르는 글들도 있다. 글의 주제와 글의 형태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은 모습 그 자체가 난 문학적으로 보였다. 소재와 형태가 모두 다른 문학과 말이다. 어쩌면 문학을 뿌리에 둔 글들이니 문학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평론이 낯설고 난해한 문학의 형태를 많이 쫓아갔었다. 그래서 문학 평론이 보통의 독자와 먼 거리감을 가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나에게 낯선 글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익숙한 글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때로는 한 번에 와닿도록 풀어내기도 하고, 몇 번을 곱씹어야 그 맥락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느 글 하나도 저자의 표현처럼 쉽게 완성되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 쉽게 다가온 글이 있으면 괜히 더 들여다보곤 했다. 혹시 내가 쉽게 지나쳐온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저자가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사유한 뒤에 적은 감상을 내가 오로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생각과 감정을 나는 오로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그 불가능한 이데야라고 할지라도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감상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이 참 예뻐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비관적이지 않고 희망적이라서 그렇고. 어렵지 않고 쉬워서 그렇다. 희망이 아닌 절망, 기쁨이 아닌 슬픔을 조망한 글 속에서 희망과 기쁨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건져 올리는 그의 따뜻한 시선도 한몫한다. 문학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이해는 꼭 비평적 언어를 사용한 깊이감이 아니라, 그 작품 자체를 얼마나 깊이 있게 사유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유의 방향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희망을 머금은 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방해하는 저급한 감정에 대해서는 깔끔하고 단정한 어조로 우리 사유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피력한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많은 글들이 마음에 드나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이었다. 굉장한 것이 무엇인지 적은 글이다. 언어의 수준 혹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깊이에 대하여 적은 글이 끝에 이르러 내놓은 마지막은 유독 나의 마음을 울렸다. 굉장하다. 이 진부하고 익숙한 말이 전혀 다른 세계로 끌어낸 예를 그는 그 예시와 닮은 방식의 글로 풀어낸다. 하나 둘 풀어가 마치 눈앞에 장막을 걷는 듯, 마지막 예시를 딱 제시한 순간! 더 이상 굉장한은 진부하지 않은 단어로 바뀌어 있었다. "정확한 순간에 제대로 사용될 때 어떤 오랜 단어는 갑자기 빛을 뿜어낸다"라는 말처럼 그의 글 자체가 이 문장을 드러내는 글이었다. 이처럼 그의 글은 문학적 사유이자, 문학이다.


"10년 후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나대로 시도해보았으나 결과는 이렇게 변변찮다. 수업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빠르고 깊이 있게 분석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소개한 작품과 그 작품 저변에 놓인 또 다른 작품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작품을 바라본 '나(신형철)'에 대한 이해가 적절하게 담겨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두 생각 사이에 발생하는 틈이다. 그 틈 사이로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나는 이 사회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이 시작된다. 타인에게 말하듯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게 말하는 그의 글은 그의 생각을 엿보듯 나의 생각을 들여다볼 틈을 함께 열어주고, 덕분에 그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적은 글이 내 안에서 여러 갈래의 소통의 통로를 연다. 문화 비평학을 공부하며 배운 비평 용어와 익숙한 철학자 이름에 반가웠고, 최근에 읽은 문학인들 이름에 익숙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뒤에 그의 사유 세계에서 만난 이들은 낯설었고, 새로웠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으로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처음 알았다. 덕분에 최근 그의 생각과 사유만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의 전작은 어떤 글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비슷하지만 어떤 다른 결을 지니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어떤 흐름으로 지금에 이르렀는지 궁금한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만난 근래 그의 사유 세계와 대화하는 즐거움을 더 길게 가지고 싶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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