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포이에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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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알 수 없고,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더듬듯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대해 결론이 나오고 미혹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소설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소설가는 헤매고 또 헤매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인생의 수수께끼에 조금씩이라도 다가서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겁니다."
_《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 18-19쪽


"저는 대설가가 아니라 소설가라서 작은 이야기밖에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소'설가가 말했다. 유머러스한 말장난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유머러스한 이유는 그가 한 이야기가 그의 말처럼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소설가의 이름은 에도 슈사큐다, 근대 일본 문학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본 《침묵》의 저자인 그는 서점에서 기획한 문학 강의에 연사로 섰다. 이때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 《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다.


엔도 슈사쿠의 강의 주제는 문학, 그중에도 그리스도교(기독교) 문학이다. 문학 중에 그리스도교 문학이라고 분류해서 말하고 나니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이나 깊이 자리한 문화적 토대가 그리스도교다. 실제로 서양 문학에서 그리스도교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내가 즐겨 읽는 작가 도스토옙스키,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수도원'이다. 또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목사관도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하면,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서양 문학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종교를 표면에 딱 꺼내서 '그리스도교 문학'이라고 말을 시작하니, 괜스레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어렵게 느껴지는 마음가짐을 덜어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문체다. 강연록을 다듬은 것이기 때문에 문어체로 되어 있다. 책을 라이브로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해 남는 것이 많지 않다. 보통 문학이란 책으로 접하는 것이기에 내 마음과 생각에 깊이 남겨두곤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문학이라고 하면, 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그렇기에 편안하게 접할 수 있도록 대화 내용을 책에 옮겨, 현장감을 살렸다. 편안하게 강연을 듣듯이 책을 읽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저자가 《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에서 다룬 책은 크게 《침묵》, 《테레즈 데스케루》, 《좁은 문》, 《사건의 핵심》, 《모이라》, 《예수의 생애》등이다. 《좁은 문》을 제외하고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강연장에 앉은 사람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미리 읽고 올 것을 당부했지만, 깜빡 잊은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책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이후 문학 속에서 발견한 것을 다른 독자와 나눈다. 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문학과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종교는 닿을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문학'을 말하려는 작가의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강의를 따라 차분차분 읽다 보니. "인간 심리의 깊숙한 곳, 무의식 밑의 세계까지 그려내 인간에게 교향악을 울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문학일 것이고, 그 깊숙한 밑바닥까지 파고들려고 노력한 이들이 오늘 언급한 작가들입니다."라는 말을 한 이유에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세계관 안에서 작품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말한다. 그렇기에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책이었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신은 무한히 추구되는 대상입니다. 동시에 신에 대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신앙의 발로가 됩니다. 종교의 경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인간의 애욕이라는 본능 안에는 누가 숨기지 않아도 그 두 가지가 숨어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성인이 신을 지향하는 자세는 아주 보통의 인간이 예컨대 이성에게 품는 애욕과 닮은꼴입니다.
_《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 98쪽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이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해까지 나아가기에 조금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연 말미에 이르러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가지 소리나 색이 있어 그것을 계속 쫓아가는 중에 심리보다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것, 무의식보다 좀 더 배후에 있는 것, 그런 제3의 차원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그리스도교 작가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라는 말에. 내가 왜 도스토옙스키나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아름다운 면만 세공하기 보다, 인간의 깊숙한 내면 세계를 파고들어가는 작가의 글쓰기에 매료되곤 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내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개인과 그리스도교 소설가로써 작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생각의 모순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학 작가로 고민하고, 이에 대하여 결론을 정리한 부분이 유독 좋았다. "인간의 더러운 것, 가장 비참한 것, 가장 징그러운 것,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것에도 제대로 된 음색을 울려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종교"가 아니듯, 인간의 "완전히 더럽고 지저분하고 질퍽하고 혼돈된 곳으로 손을 푹 찔러 넣어야 하기 때문에" 화상을 입게 되더라도 작가로서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 그 어려운 생각을 여러 강연을 통해 서서히 풀어놓아 마지막 강연에 정리해낸 부분이 인상 깊었다.


"예수상이 새겨진 동판인 후미에를 밟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시의 기리시탄에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밟는 일이었습니다."
_《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 17쪽


끝으로, 책을 다 읽은 후. 다른 문학 작품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데,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작품은 궁금해진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하다니. 적어도 나에게 그는 성공한 연사였다.  그런데..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마음과 내 마음이 조우한 순간이 올해 안에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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