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가 정박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배와 같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9편이 실린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9가지 이야기 속 9명 혹은 그 이상의 인물들. 그들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듯 보인다. 어린 나이에 해외로 입양된 사람, 갑자기 해외로 이민 간 사람, 또 다른 이유로 가족들과 멀어진 사람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혹은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하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이 내린 결론은 어디에도 자신이 뿌리내릴 땅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그 사실에 허탈해 하는 감정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각각의 상황과 삶의 경험이 다르듯 모두 다른 모습이다. 그 다른 포인트를 작가 임재희는 잡아낸다. 단편 소설의 형태로, 넋두리하듯 읊는 형태로, 주인공의 시선으로 혹은 다른 인물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 다른 소설 속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낸다면 애써 괜찮은 척, 무덤덤한 척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는 모습과 무심결에 나온 속마음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그들의 마음속 고독의 자리가 꽤 깊다는 점이다. 

선택의 문제는 늘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동희는 가족이 있는 미국을 자주 드나들어야 하니, 미국 국적이 아무래도 편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한국에 정착하려면 한국 국적이 좋을 거라는 생각 사이에서 잠시 갈등이 일었다. 그 어느 곳도 온전히 편한 곳은 없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서로 엇비슷했다.
<히어 앤 데어>, 11쪽

대학에서 <다문화·젠더·발전문제>나,<문화인류학> 수업을 들을 때면 빠지지 않았던 주제를 다룬 소설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동안 나의 시선이 주로 아시아계 중 동남아 여성들의 결혼 이주, 조선족,  재일 교포 2세, 3세 등에 멈추어 있었다. 임재희 소설가의 작품들은 미국 이민을 주로 다루고 있다. 미국 이민, 입양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배운 내용을 토대로 인터뷰를 재구성한 걸 읽는 듯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소설 읽기 태도를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글을 읽을수록,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얼마나 다른 정도인지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지가 아니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겪어야 했을 정체성의 문제 본질이 어디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에 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야. 그렇게 다른 것들을 같은 조건으로 비교하면 고유한 것들이 묻혀버리고 말잖아."
<천천히 초록>, 110쪽


만약 이주, 이민의 문제만으로 소설들을 읽는다면, 과연 이 소설에서 독자인 내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은 '그들의 혼란'으로 구별한다면, 표류하는 이들을 그저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의 고민을 내 고민인 듯 끌어안아야 한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민에서 내가 겪었을 법한, 어쩌면 내가 겪을지도 모를 고민을 발견할 시각으로 보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나의 읽기를 고백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문화권이라는, 국가라는, 민족이라는 층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생각을 트이게 한 작품이 바로 <동국>이다. <동국>을 읽으며 가족 공동체에서도 찾지 못한 소속감을 나라는 존재 의미를 묻고 답을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국이란 인물을 통해 '나'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분명 무언가 내게 가깝게 다가오다 멀어지는 걸 느꼈다. 불분명한 기억이나 꿈일까. 희미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끊기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감정의 덩어리가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그것들을 애써 밀어내려고 하는 의식과 끝까지 붙들어보려는 의식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천천히 초록>, 94쪽


9편 소설을 읽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이민 간 사람, 해외 입양된 사람, 국제결혼한 가정, 국제결혼 후 이혼한 사람. 이렇게 쉽게 요약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나가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 속에 담긴 삶의 깊이는 참, 깊었다. 외국인 등록증을 받으러 가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동희의 속마음처럼. "어떤 날은 외로움이 이유 같았고 또 어떤 날은 혼란스러움이 이유 같았는데, 그녀 자신도 정말 그것들이 이유가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그런 이유들은 때때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밖에 내보이지는 않았다. 삶이 그렇게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히어 앤 데어>, 18-19쪽)" 그리고 동시에 우리 역시 삶이 생각만큼 명쾌하지 않아 힘겨운 때가 있다. 어디든 소속감을 가지고 싶지만 그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아 힘겨운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때론 가족일 때도 있고, 학교일 때도 있고, 직장일 때도 있고, 마을 일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옆자리일 때도 있다. 국가와 문화 정체성에 비해서 작아 보인다. 하지만 어딘가에 속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심리는 비슷해 보인다. 

삶의 격정적인 순간들이 다 지난 뒤에 남겨진 여운처럼 파스텔 톤의 꽃잎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홍에 대하여>, 154쪽


9편 소설 속 인물들의 마음에 스치는 공허감은 소속되지 못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만이 세울 수 있는 나의 존재감을 정박하지 못해 느끼는 고독이 아닐까 싶다. 소속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 나의 정체성을 소속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밀려나, 나 자체로 나의 존재감을 만드는 사유에 작가는 주목했단 생각이 든다. 물론, 대한민국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문화에서 평범하게 자라온 사람과 다른 고민을 안고 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를 떠올리면 그림의 한 부분이 지워지거나 뭉개져 있는 느낌이 들어. 시간의 한 부분이 뭉텅뭉텅 잘려나간 느낌이 든다고. 그런 기분 모르지? 머리와 다리만 있는 몸으로 사는 느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거냐는 질문도 하지 마. 날 자꾸 몰아내는 것 같아. 어디에서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라며 말하는 질문에 느껴지는 까칠한 감정을 통해 소설가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누구나 어디에 속해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로 존재감을 느끼길 바란다'가 아니었을까.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오래전에 와봤던 곳을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처럼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히비스커스 붉은 꽃 하나가 소리 없이 활짝 피어날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220쪽

추석 날 읽어 의미가 남달랐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