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삶에 관해 배운 가르침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삶은 계속된다.

 

 

 

 

 

 

내가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 나는 평일이면 인디애나폴리스 북쪽에 위치한 화이트 리버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이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학교에서 나보다 훨씬 거대하며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특정한 시간, 다시 말해 오후 12시 37분부터 1시 14분까지 점심을 먹어야 했다. _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첫 문장

 

첫 문장 치고 제법 길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받은 느낌, 이 소설의 주인공 꽤나 까다롭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시작을 이렇게 열 만큼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 한 문장에 이렇게 수식을 많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분 단위로 생각한다는 건 남다른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관찰력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남들은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게 한다. 이를 장점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삶이란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지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나는 배워가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라면, 의미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이자 홈스는 대입을 눈앞에 둔 학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그녀는 첫 문단에서 내가 간파했듯이 성실하게 공부를 하고, 그 결과도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단짝 데이지와 함께 대학 진학을 희망하지만, 두 사람이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하기 망설이는 이유가 성적이 아닌 비싼 학자금(좋은 대학일수록 비싼 미국의 대학) 때문이라고 하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리고 에이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이해하고 감수하는 병을 앓고 있다. 가볍게 말하면 건강염려증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일종의 강박증이다. 자신이 세균의 침투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에이자의 머릿속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넌 종종 비유로 네 경험을 이해하려 하는구나, 에이자. 네 안에 악마가 있는 것 같다는 표현도 그렇고, 네 의식을 버스나 감방, 나선형, 소용돌이, 고리라고 불렀지. 여러 번 덧그린 원 같다고도 했고. 참 흥미로워."
"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통증의 어려운 점은 실제로 은유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거야. 테이블이나 몸을 보여 주듯이 보여줄 수는 없지. 어떤 면에서 통증은 언어의 반대라고 할 수 있어."

 

그녀의 주치의 닥터 싱의 말에도 에이자의 생각은 확고하다. 약을 처방받고, 검사를 하고 결과는 늘 정상으로 나오지만. 그럼에도 의사의 말보다 자신이 찾은 정보, 자신의 생각, 그리고 무언가 몸에서 느껴지는 신호를 더 믿는다. 흥미로운 건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계속 살아간다는 점이다.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 또래보다 임박해왔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말하지만, 자신의 주변은 자꾸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 절친한 데이지가 있고, 데이비스가 있다.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 감염을 확신하고 매일 약을 먹지 않으면 손 소독제를 먹기까지 해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는 때도 있지만 에이자에게 삶과 죽음은 굉장히 가까이 붙어 있다. 에이자의 이 복잡한 심경은 그녀가 성인의 문턱에 서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삶과 죽음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을 반복하는 모습이 이해가 된다. 청소년이라고 말하기에 에이자의 나이는 꽤 많아 보인다. 대학생이 직전 우리 나이로 보자면 고3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다 컸지만, 아직 고등학교 내에서 점심시간마저 통제 당해 마치 학교에 수감된 '어른'인 그녀는 성인으로 들어서기 직전이라기 보다, 청소년의 끝자락에 선 듯싶다.

 

데이비스는 널 정상인처럼 대하고, 너도 정상인처럼 대답하지만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야. 정상인은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할 수 있어. 정상인은 너처럼 땀을 흘리지 않아. 정상인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고르듯 자기 생각을 고를 수 있어. 네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너도 알고, 데이비스도 안다고.

 

연애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에이자는 데이비스에게 끌린다. 그에게서 자신의 결핍과 비슷한 점을 발견해서인지. 데이비스에게 진 부채감 때문인지. 정말 단번에 이끌렸는지. 그 이유는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에이자는 데이비스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에이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느낌에 대해 꽤나 깊게 고찰한다. "나는 아까 데이비스가 한 질문,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다'라는 참 이상한 표현이다. 마치 도랑에 빠지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할 때처럼 '빠지다'라는 표현을 쓴다. 사랑 외에 다른 것, 이를테면 우정이나 분노, 희망에는 '빠지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에만 빠질 수 있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고찰 뒤에 사랑에 빠지는 기분을 잘 알고 있고,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그럼에도 입 밖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통증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하던 에이자와 다른 모습이다. 사랑에 대해 말할 상대가 데이비스이기 때문인지, 그 감정이 사랑이기 때문인지는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 생각이 나선형으로 돌아갈 때 나는 그 나선형에 '빠지고', '나선형의 일부가 된다고, 또한 어떤 감정에 빠지면 전에는 묘사할 수 있는 단어와 형태가 생기지만, 난 그걸 어떻게 입 밖으로 내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에이자가 청소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 같은 이유는,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자란다', '성장한다'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청소년에게는 잘 어울린다.  편견일 수 있지만. 에이자는 소설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이다. 예민한 에이자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점점 달라지는 에이자의 모습 그리고 데이지와 다툼, 교통사고, 데이비드와 관계 변화 등이 지나간 뒤 에이자의 마지막 말은 그녀가 자랐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해준다. 청소년의 끝자락에 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여느 청소년이 갖추고 있는 풋풋한 감성보다 조금 깊이 있는 고민과 심정이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수 고유명사인 '나'는 늘 주위의 영향을 받으며 계속 살아 나갈 거야.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강박증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박증이란 정신질환을 소재로 글을 썼지만, 이상하게 에이자의 행동은 나와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계속해서 자신이 정상인이 아닌 괴물이라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을 읽다 보면. 그녀를 더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기 때문에. 그녀가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결말을 맞이했어도 그 나름대로 이해를 했을 것 같았다. 이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한 건 아니지만. 다른 적절한 단어를 에이자처럼 떠올리지 못한 나는 '이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에이자는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기 전부터. 어느새 난 그녀의 이야기가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하면서 동시에 솔직하지 못한 그런 모순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난 이상하게도 납득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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