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국어 시간마다 나를 힘겹게 한 건
'시'였다. 그 짧은 글에 담긴 의미들이 내 눈과 마음에는 잘 보이지도, 느끼지지도 않아, '시'를 볼 때면 한숨을 푹푹 쉬곤 했었다. 그랬던
나지만 그래도 시 중에서 내가 마음 편하게 마주했던 시는 '고전 문학'이었다. (나오는 작품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부하면 거의 다
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컸지만) 비교적 작품에 담긴 의미들이 직접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짧게 200년 전, 길게 1000년 그 이상의
시간에서 건너온 시들이지만 그 '시'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복잡하지도, 난해하지도 않았다. 사람이라면 혹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느꼈을 법한
보편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전 문학 작품을 공부하는 건 즐거웠다.
고전 문학이 좋았던 이유는 단지 시험 때문은
아니었다. 그 시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다. 역사를 좋아했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야기가 있는 '시'는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시의 저자가 많은 경우 작자 미상으로 전해진다.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에 그가 담고자 한 이야기는 시대와 시간을 넘어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전해졌다. 중고등학교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난 난, 시에 담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시를
분석적으로 바로 접근하기보다는 그 시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 선생님의 설명. 그리고 그 뒤에 다 같이 낭송한
경험 덕분에 수능을 본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는
제목은 조금 딱딱해 보인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내가 만났던 국어 선생님의 마음처럼, 어렵고 난해하다고 생각할법한 '고전 문학'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친절한'이라는 수식어로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이 담겨 있다. 25년 동안 고등학생에게
문학과 논술을 가르친 저자는 아마 학생들이 어떨 때 그 작품을 오래 기억하는지, 기억을 넘어 마음에 닿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목차를 읽다가 피식피식 웃음이 자꾸만
나왔다. 모두 내가 배운 작품이었고, 교과서에서 배우고, 수능특강에서 만나고, 모의고사에 등장했던 작품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번
이상씩 출제되었던 작품이기 때문에 숱한 국어 문제집에서 보았던 작품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려고 하니 어색했다. 왠지 서너 편의 시를 보고 난 뒤에
확인 문제가 나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입시 공부가 무서운 법이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작품을 보지 않아도 되는 난, 마음을
내려놓고 작품과 그 작품의 뒤에 담겨 있는 이야기에 집중해보았다. <황조가>, <구지가>, <서동요>,
<처용가>, <가시리>, <정과정> 등과 같이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작품도 있었고,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도통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알고 있는 작품은 확인하는 재미로, 기억이 나지 않는 작품은 내 기억과 이야기를
맞추어가는 재미로, 처음 알게 된 이야기는 새로운 걸 아는 재미로 읽었다.
예쁜
그림과 이야기가 함께 한 고전 문학
그림이 예뻤다. 마치 영화 <오세암>을 보는 듯한 느낌. 처음 TV에서
<오세암>을 보았을 때, 슬픈 이야기에 눈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슬픔을 부드럽게 그려낸 그림 때문에 더 눈물이 많이 났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고전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특유의 정서가 있다면, 바로 '슬픔'이다. 사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에나 슬픔으로 작품을 만든
경우는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만의 슬픔의 정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미묘함이 있다. 그 미묘함을 삽화로 담아 내기 위해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기도 했고, 왠지 사극 드라마 속 한 장면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그림 덕에 이야기를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친구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삽화가 책에 있다. 그림 동화를 보듯이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긴 글보다 그림 한 장이 우리나라 특유의 슬픔의 정서를 잘 잡아낸 것 같아 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경어체를 사용한 글은 마치 글 속에
내가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어린 친구들이 책을 읽으면 나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읽지 않을까 싶었다. "~했다고 전해진다."라는
식으로 딱딱하게 문제집 하단에 적힌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우리가 문제집이나 교과서에 적혀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누군가의 입에서 들었을 때 더 잘 기억한다. 내가 교과서의 페이지보다는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신 선생님이 더 많이 기억하듯이. 이야기가
가장 잘 기억될 수 있는 방법으로 쓴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로 고전문학을 만나기 전에 이렇게 먼저 고전문학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낯선 단어가 나오지만 고전문학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우리가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이렇게 예쁜 그림으로 만나는 건 아직 고전문학을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참 의미 있는 일이 될 테니까.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음률에 맞추어서 국어시간에 불렀던 기억이 난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 같이 부르던 그 시간은 고등학교 때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추억이 너무 강해서일까. <청산별곡>이라는 이름에
바로 후렴구가 생각이 났는데. 이상하게 왜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나 속세의 모든 것을
잃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마음"을 노래했다는 시의 서두를 읽자, "아~"하고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고려 말에 갈수록 살기 각박해진 현실에
유행했던 유행가였다는 기억이 났다.
<청산별곡>은 암울한
시대상을 노래한 고려 시대 유행가이기 때문에, 그 배경에 대한 설명 보다 시 자체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자 미상의
시라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가 분명한 작품은 자세히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지만, 청산별곡처럼 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없는
경우에는 시 자체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시구 한 문장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교과서나 참고서와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훨씬 부드럽고 읽기 쉽게 적혀 있다. 마치 누군가 말하는 설명문을 읽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다 읽고 난 뒤에 간단한
요약정리로 한 번 더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장치는 마냥 작품을 작품 자체로만 즐기기 어려운 고전 문학 현실을 보여주는
듯싶다.
고전 문학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중학교 1학년 때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든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와 작품도
시험이나 공부와 연관된 순간 관심이 떨어진다. '그때 그 사람들은 왜, 어떻게 이런 글을 남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로 풀어낸 책으로
고전 문학을 만난다면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고전 문학을 교과서나 문제집으로 만나지 않은 동생이 있다면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를 선물로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