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의 여자들
모니카 페츠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생각지도 못한 반전.
아직 내가 감당하기 벅찬 어른들의 우정.


쾰른에 살고 있는 카롤리네는 매달 첫 번째 화요일에 네 명의 친구들과 같이 '르 자르댕'에서 식사를 한다. 두 자녀를 둔 카롤리네는 언변이 뛰어난 변호사다. 유명 디자인 회사의 디자이너이지만 무언가 초조함을 느끼는 키키, 의학도였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 했지만 지금은 네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기 바쁜 에바, 제약 회사 재벌과 결혼해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에스틸레 그리고 자유로운 듯 그렇지 않은 듯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유디트.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던 다섯 사람에게 첫 번째 화요일은 당연히 함께 만나 음식을 먹고 각자의 삶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 "화요일의 여자들"이다.

 

"화요일의 여자들"의 다섯 사람은 매년 함께 여행을 갔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매달 화요일에 만난 것처럼 이번에 계획했던 여행을 떠난다는 건 카롤리네, 키키, 에바, 에스텔레 그리고 유디트 모두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는 것이 이상했다. 무려 15년간 지속되어 왔던 일이니까. 하지만 유디트의 남편인 아르네가 세상을 떠나면서 달라진다. 매달 첫 번째 화요일에 먹었던 식사 자리도, 그들이 계획했던 여정도 모두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남편을 잃은 유디트가 있다. 유디트는 죽은 남편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는 남편이 걸었던 미완의 순례자의 길을 대신 걷기로 한다. 아르네가 죽은 뒤 계속 무기력했던 유디트가 결심한 일이라는 걸 아는 네 사람은 그 여정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다섯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시간이 된다. 단지, 순례자의 길을 걷는 과정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걸음을 걸으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들의 마음에 저마다 가장 자신을 힘겹게 하는 문제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순례자의 길은 다섯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 힘들었다. 그리고 걸으며 알게 된다. 유디트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나머지 네 사람 역시 각자 삶을 힘겹게 만드는 문제들이 있었다. 내색을 하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감당하려 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인을 보기도 했고, 계속 걸려오는 전화에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동안 그 문제는 멀어질 듯 그녀들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유디트가 계속 숨기고 싶었던 일기장엔 유디트가 외면하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던 비밀이 담겨있다. 아르네가 적고, 유디트가 숨기고 싶었고 화요일의 여자들이 간절히 보고 싶었던 그 일기와 함께 오랜 시간 함께 했던 화요일의 여자들 사이에 무언가 엄청난 일이 생긴다. (이 이야기를 적어버리면 이 소설의 놀라운 반전이 다 밝혀지기 때문에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루드르에서 마주하게 된 현실은 다섯 사람의 삶에 크고 작은 분수령이 된다.

 

"내 마음은 무엇에든 열려 있어. 옳은 방향으로만 간다면."

 

루드르까지 걸음을 걷는 동안 다섯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례자가 된다. 물론, 이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는 영적인 기적은 아니다. "길이 힘든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게 힘들지요."라는 말처럼. 걷는 동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꼭 길에서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길에서 누군가는 하룻밤 묵는 숙소에서 누군가는 비밀이 다 밝혀진 순간에 누군가는 낯선 이와 함께 요리를 만들며. 저마다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방식은 자신들의 모습들이 다르듯 달랐다. 가장 극적으로 그 순간을 마주하는 건 유디트와 카롤리네였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변화를 맞이한 사람은 에바였다, (에스틸레와 키키의 변화도 다루지만 세 사람의 변화가 무척이나 강렬했다.)

 

친구들이 에바의 입에서 '나'라는 말을 들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 '나'는 아직 작고 여리고 소심했지만 당당히 하나의 의미 있는 말이 되어 나왔다. 그 '나'는 걷기와 관련 있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계속 걷는다. 움직인다. 하지만 같은 걸음이라도 순례자의 길 위에서 걷는 걸음은 그 느낌이 다르다. 걸음을 걷는 본인들에게도, 걷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순례자의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이유는 그 길은 일상 속에서 당연한 듯 걷는 길과 달리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에바는 끊임없이 가족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고, 키키는 자신의 연인이 그 길에 동행을 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본질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었던 순간을 다섯 사람은 순례자의 길에서 맞이한다. 눈앞에서 그 문제가 멀어져야 그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하지만 두 다리로 걷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 동안 '나'에 대해, '나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루하루 삶을 산다는 이유로 보지 못했던 '나'를 돌아볼, 돌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우린 그냥 그럭저럭 이어져가는 일상 속에 문제를 숨겨두고 있었어."라는  카롤리네의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문제가 존재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진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임을 회피하는 건 무의미했다."라는 말처럼 그 문제의 진실과 마주하는 건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문제가 그러하듯, 막상 닥치고 보면 힘들긴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라는 문제의 또 다른 속성을 알려주는 걸 《화요일의 여자들》 은 잊지 않는다.

 

내가 이 소설의 서두에 "아직 내가 감당하지 벅찬 어른들의 우정"이라는 문장을 적은 이유는 《화요일의 여자들》 속 화요일의 여자들이 스스로 결정한 마지막 결론 때문이다. 아직 15년 동안 이토록 꾸준히 만난 친구도 없고, 결혼을 한 적도 없고, 40대에 들어서지 않아서인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다섯 사람 그리고 그 다섯 사람 중에 두 사람이 결정한 마지막 관계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에 대해 난 "?"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독일 독자층에게 공감을 받고, 독일 현대 문학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슈피겔 베스트셀러"란 타이틀이 있는 걸 보면 꽤 많은 사람은 《화요일의 여자들》의 결론은 용두사미나 허황된 건 아닌 듯싶은데. 나에게 《화요일의 여자들》의 마지막은 감당하기 벅찼다.

 

이 순간 그녀는 만족스러웠다. 자기 자신과 세상이.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내일이.

 

과연 내가 《화요일의 여자들》을 선물한 그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매주 화요일마다 함께 했던 수업과 한 학기 동안 함께 걷지만 다르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고군분투했던 시간에서 무엇을 건져올렸을까. 궁금하다. 어느 화요일에 다시 그 친구와 만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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