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필립 한든 지음, 김철호 옮김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한 장 나뭇잎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네 삶을 소박한 여행처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짐이 없고 복잡하지 않고 산만하지 않은 여행,
집중과 의식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가벼움과 빛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_ 자유로운 여행가의 소지품 목록, 13쪽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남들은 좀처럼 동의하지 못하는 '취향'이라는 기준으로 참 많은 물건을 모았다. 나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면 더더욱 버리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덮던 이불이 헤어져 이불을 솜이 비치는데도 버리는 걸 반대했었다. 결국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내가 학교 간 사이에 어머니가 이불을 버리셔서 이별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 이불의 색과 감촉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부모님이 이사를 하시며 실수로 중학교 2학년 때 과학 교과서를 버리신 것이다. 그때 정말 부모님께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불만을 표했을 만큼 물건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의 난 물건을 정리하는 데 거침이 없다. (물론 잘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몇 개 있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달라진 점 중 하나다.
 
커다란 택배 박스 3개.

내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며 쌓던 짐의 양이다. 1학년 1학기부터 3학년 2학기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안의 물품은 매 학기 조금씩 달라졌지만, 박스 3개 정도 안에 담긴 물건으로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택배 박스 3개로 생활한 데는 내 방만한 기숙사 방에 3명이 살았기 때문도 있지만, 나에게 의미 있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 컸다.


소박함. 심플함. 소소함. 작음.

 

위 단어들이 자연스레 내 일상에 물들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소박함에서 소담한 가치를 발견해 즐기는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지금의 트렌드가 "단순하게, 단순하게"를 외치던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영향인지 혹은 그 이전 성인들에게서 시작한 건지 모르지만 가지고 싶은 것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다. 그럼에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 분위기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체념'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소확행, 가성비를 따지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스치는 아쉬움은 어찌할 수 없다. 물론 많은 현인들은 말한다. '지금! 이곳에! 주어진 것에!' 행복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는 말을 한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안 되는 걸 어떻게 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일생을 보낸, 단순한 삶의 주창자"라고 불린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열이틀간 여행 짐을 75㎏짜리 짐을 꾸렸다는 사실은 작은 위로가 된다. 종이와 우표, 식물학 서적, 휴대용 현미경, 조류 관찰을 위한 소형 망원경까지 챙겼지만 기록할 만년필이나 작은 연필 한 자루를 챙기지 않은 그의 소집품 목록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열이틀간 그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사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인물인 조시마 장로를 비롯한 41명의 여행자들의 소집품을 나열한 책,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이다. 어떤 목록은 단시처럼 짧고, 어떤 목록은 참 길다. 그래서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은 시집 같다.

 

'말'에서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있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물건'도 비슷하다. 무엇을 아끼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 습관을 유추할 수 있다. 41명의 소지품은 저마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일 것이다. 그 길이도, 리스트도 모두 달랐다. 겹치는 물건도 있었지만, 그 물건에 담긴 의미는 달랐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오가는 사람의 10개 남짓 짐 속 '두꺼운 가죽 성경책'이 가진 의미. 엄청난 노동과 불굴의 의지로 번 돈으로 '자유'를 샀던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을 늙은 노예에게 물려준 재산 중에 '성경 찬송가 합본 한 권'이 가지는 의미. 같은 물건이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에서 공통으로 들어가는 걸 찾는 건 무의미하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한 바퀴를 도는 원은 완성되었지만, 나는 온전히 돌지 못했다. 나는 그 기나긴 여정을 통해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_ 윌리엄 '리스트 히트 문'

 

그렇다면 41명의 여행자의 수집품을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나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물건은 그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데, 리스트를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이다. 누군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소유물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을 읽는 의미가 크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두고 혹은 짧은 여행을 준비하며 꾸린 소지품과 그들의 인생을 퍼즐 맞추어보듯이 살펴볼 때 의미가 보인다. 혹은 당사자의 짧은 말에 응축된 삶의 지혜를 찾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모든 사람의 이야기와 소집품이 동일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어떤 건 눈에만 담았고, 어떤 건 마음에 담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보니 내가 발견한 메시지가 대부분 지금 나의 고민과 닿아 있었다. 유난히 눈과 마음에 밟히는 것이 있다면 잠깐 넘기던 책장을 멈추고 사색에 잠긴다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속에 나열된 수많은 수집품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확인하는 게 해주는 책이었다. 덕분에 나에게  행복함을, 자유로움을 안겨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 책을 읽기 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무게는 얼마큼 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를 읽고 난 뒤에 내가 알게 된 건, 그 무게는 마냥 가벼운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저자가 독자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 가진 의미는 이게 아닐까.

 

우리는 물질을 소유하면 기쁨을 얻는다.
또 우리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기쁨을 얻는다.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기쁨 사이에서 우리는 삶을 춤추어야 한다.

 

자유로움을 느끼는 건 결국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물건을 소유보다 내가 소유한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더 중요한 법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자꾸만 소홀히 여기는 깨달음이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렵다면,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첫 해외여행을 갈 때, 짐을 몇 번이나 싸고 풀기를 반복했다. 옷을 넣었다 빼기도 하고, 필통 속 필기구를 재정비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제법 많이 여행을 다녔지만 아직도 난 짐을 한 번에 싸지 못한다. 다만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한 달 이상 동안 다녀오는 여정을 위한 짐을 싸는 것도 경험을 토대로 한 요령이 필요한 법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언제나 배낭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이 소유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_ 에릭 호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생이란 여행을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이유를.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은 넌지시 이야기한다. 내가 자유로움을 느끼는 무게는 내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짓누르는 초조함의 무게가 결정한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