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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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을 읽었다.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인 매트 헤이그의 소설이다. 앞으로 베네딕트컴버배치가 주연인 영화가 등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소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시간을 멈추는 법》은 평범한 사람보다 약 15배로 천천히 성장하고, 나이 드는 톰 해저드의 이야기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신체를 가진 그는 1581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그 생을 이어간다. 그동안 프랑스,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스리랑카, 두바이 등 전 세계 곳곳을 다녔다. 원해서 옮긴 적은 거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도망치듯 옮겨 다니기 바쁜 삶이었다.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특별한 신체는 남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목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던 톰 해저드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이 삶이 상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결국 나의 생은 벌이었다. 그 누구의 죽음도 잊히지 않았다.

 


도깨비의 김신이라는 캐릭터였다. 불멸의 삶이 벌이었다고 고백한 그의 대사와 톰 해저드의 말이 겹쳐 보였다. 물론 하나하나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만큼 다른 점이 많다. 하지만 톰 해저드의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싫었다. 죽을 만큼 외로웠기 때문이다. 이건 보통 외로움과 차원이 다르다. 사막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아는 사람들을 속속 잃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 자신마저 잃어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과 함께 했을 때의 나를 잃어 가고 있다고."이 고백 앞에서, 불현듯 도깨비의 김신의 대사가 떠올랐다.


불멸의 삶에 대한 꿈.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벌이었고, 고통이었던 그 삶에서 찾은 것을 밤하늘의 별처럼 수놓은 책이 《시간을 멈추는 법》이다.


《시간을 멈추는 법》은 톰 해저드는 지금까지 단 한번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살았고 그 추억이 깃든 '런던'에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그에게 런던은 그가 지나온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였다. 무뎌지고 싶었던 감정과 잊고 싶었던 기억을 순간순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고, 감당해야 할 통증을 느끼게 하는 런던에서 그 과거를 떠올리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 교사로 삶을 선택한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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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원'은 수많은 '지금'들이 모여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지금'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모든 '지금'들의 유령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하루살이라면, 자신의 삶은 앨버트로스라고 불리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지만 부정할 수 없는 톰 해저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그 틈에 껴서 존재할 뿐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삶을 사는 그는 '진정한 고독' 그 자체인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의 당부 그리고 어딘가 살아있을 자신의 딸을 만나기 위해 살 뿐. 그에게 하루하루는 큰 의미가 없다. 겉보기에 40살처럼 보이지만, 이미 400년들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살았지만, 여전히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이었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주어진 지금이 남들의 열다섯 배가 되기 때문에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는 데 열다섯 배의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질문은 《시간을 멈추는 법》 전체를 이어주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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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은 한자리에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지만 나는 아직도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지 못하고 있다. 영원히 이런 기분을 안고 세상을 떠돌게 될까? 언젠가는 어딘가에 멈춰 서게 되지 않을까? 결국에는 목적지인 항구에 다다르게 될 텐데. 내가 아는 것이든 모르는 곳이든. 목적지가 없다면 출항할 이유 또한 없다. 나는 지금껏 제각각의 많은 사람들로 살아보았다. 무수한 역할을 떠맡아 봤다. 나는 한 사람이 아니다. 내 몸에는 군중이 담겨 있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는 모순적인 톰의 삶을 보고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죽지 않는 것이 삶의 전부라면, 톰은 조금도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 톰은 굉장히 힘들어한다.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일까? 정확하게 톰에게'만'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에 그 누구도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현실이 그에게 깊은 고독을 안겨준 이유는 그 긴 시간을 함께 보낼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긴 시간은 그에게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에 적당히 살아갈 수 있는 거짓말이 채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톰에게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었다. 결국 시간은 모두에게 비슷한 정도로 공정하게 주어졌을 때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톰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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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도덕적 나침반이 있어. 누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잖아. 어디 가 북쪽이고, 어디 가 남쪽인지. 우린 그 나침반을 믿어야 해, 안톤. 널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도 절대 현혹되어선 안 돼. 선생님을 무조건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야. 자동차 광고에서 봤지?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기본 옵션으로 따라온다고들 하잖아. 네게도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이 이미 장착돼 있어. 인간의 기본 옵션이니까. 음악처럼. 넌 그냥 듣기만 하면 돼."


톰이 매사에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지나가고 있는 시간을 무덤덤하게 흘려보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순간순간 타인의 삶에 들어선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언을 해준다. 안톤에게 한 조언은 특별한데, 이미 정해진 모범 답안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칸트의 '도덕률'의 개념과 닮은 그의 말. 그 말을 안톤에게 하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말을 잘 이해했는지를 고민하고, 아이가 자신이 한 말을 받아들여 전혀 다른 삶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해하고, 뿌듯함을 느끼던 그도 서서히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헨드릭의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톰의 삶에 들어온 헨드릭, 그는 톰을 지켜주고 매리언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앞세우며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지른 헨드릭을 톰은 받아들이기만 했다.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던 허친슨 박사를 죽였을 때를 시작으로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말이다. 범죄 사실을 알았던 순간에 마음을 강타했던 죄책감, 양심의 가책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시간을 견디지 않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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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달라. 사랑이 없으면 삶에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녀와 함께 한 칠 년은 내 생에 최고의 시간이었어. 이해돼? 그 전후로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내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 본 건 그때뿐이었어.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오로지 나로 존재하는 때, 《시간을 멈추는 법》은 사랑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톰이 약  430년간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때는 로즈를 만났을 때였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며 인생이란 무대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을 만큼 그가 가장 용감했던 때였다. 어쩌면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무모함이 아니라 생의 찬란한 순간임을 받아들일 때 그 시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기억이 계속 부여잡는 장면은 로즈와 함께했던 순간이었고, 그가 고독을 견디며 살아가게 만드는 존재가 매리언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포였다.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공포와 사랑. 그것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라는 그의 회상에서처럼 그에게 사랑은 이중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 그는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 사랑에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를 무용지물로 만들 만큼 강력한 사랑이야말로, 톰의 삶을 스스로 존재하는 순간으로 이끌었다. (첫사랑이 끝 사랑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던 그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 세밀하게 나오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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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분명해졌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고. 왜?


내가 바로 미래니까.


그는 긴 생을 살았지만, 그 긴 생을 돌아보는 지금 자신의 삶의 이유를 알게 된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마음을 열지도 않고" 살아가던 지난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탄탄하게 이끌고 온 이야기가 마지막에 후루룩 끝나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매리언과의 만남부터 빠르게 진행된 이야기의 속도를 따라가며 맞이한 결론은 그 앞에 읽었던 어느 장 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주었다. 아직, 작가가 이렇게 톰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이유를 꼭 알지 못해도 얻은 것이 많은 소설이었다.

그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톰의 방식대로 생각하자면,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멈추는 법》을 읽는 때야말로, 시간을 멈춘 때였다. 톰이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430여 년이 걸렸다. 그런데 나는 고작 500쪽 남짓한 분량으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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