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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ㅣ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어린 시절 집에 국민학생인 내가 읽을 책이 많지 않았다. 하드커버로 된 위인전 30권(동양 15인/서양 15인)이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러 번 읽다가 지겨워져서 눈에 띈 책이 월탄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였다. 나는 삼국지를 읽고 또 읽었다. 학교 다녀와서도 읽고, 학교에 가져가서도 읽었다. 여름방학에도 읽고, 겨울방학에도 읽었다.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 기억난다. 5층에 살던 아저씨가 이사 가면서 주고 가신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 형이 세뱃돈을 받아서 산 책인 김용의 <영웅문>. 이내 <삼국지>의 자리를 <영웅문>이 대신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기간에 읽었던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사람의 아들>. 중학교 2학년 더웠던 여름방학 어느 날 저녁 어스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차가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 이야기(책) 읽기가 나에게 선사했던 끝내주게 흥분되고 순수하게 즐거웠던 그 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책읽기가 그 시절만큼의 즐거움을 주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일까. 이건 비단 나만 느끼고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책읽기의 즐거움 운운 이전에, 책을 잘 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인구 실태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읽지 않는가. 책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은 읽을 시간이 없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좋은 대학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법원도 가야 하고, 경찰서/검찰청도 가야 하고, 서면도 써야 하고, 의뢰인들을 만나서 상담도 해야 하고, 전화통화도 해야 한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서 술도 마셔야 한다. 가족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해야 한다.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봐야 한다(<해리포터>나 <오징어게임>을 안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니엘 페나크는 <소설처럼>에서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라고 단언한다. 맞다. 여기저기서 훔쳐온 시간에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영화/드라마 보는 시간을 줄이고,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을 줄여서 읽어야 한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지하철-페나크가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표현한-안에서 읽어야 한다. 페나크의 말처럼,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그는 이어서 "따지고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하는데, 어쩜 이렇게 맞는 말만 하는 것인지...).
그런데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안 읽으면 그만 아닌가. 수학 문제 풀고, 영어 단어 외우기 바쁜데 책을 왜 읽는가. 주식투자, 코인투자 하고, 돈 벌 궁리해야 할 시간에 돈도 안 되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맞다. 책 따위 읽지 않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뭔가 답답하지 않은가. 뭔가 돌파구,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문제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야 한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책읽기에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페나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다름 아닌 우리가 처한 온갖 우연한 상황이다. 제대로 된 독서는 우리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죽음에 맞서 책을 읽는다."(104쪽)
거창하게 말해서 '구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저 옛날, 어린 시절에 <삼국지>와 <영웅문>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즐거움, 그 쾌락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다. 그 쾌락을 통해 현재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고, 고통에서의 해방이 구원이라면, 책읽기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책읽기에 쾌락을 맛보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이야기는 인간들의 아귀다툼을 멈추게 하고, 이 각박한 세상에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사랑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다. 그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사랑이었다."(38쪽)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책읽기'에 관한 책이다. 페나크의 글은 유쾌하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페나크의 글은 좋은 사람이 하는 좋은 얘기라는 느낌을 준다. 아이가 책을 읽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는 부모님(그러면서 본인도 책을 잘 읽지 않는 부모님), 수학 공부하라고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 학생들이 도무지 책을 읽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그러면서 본인도 책을 잘 읽지 않는 선생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읽으면 좋을 책이다. 3시간 정도만 훔쳐 오면, 우리는 구원의 열쇠를 손에 쥘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