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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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틀 라이프> 1권을 2016년에 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초판 1쇄인 것을 보니 아마도 출간되자마자 바로 산 듯하다. 읽지 않은 채로 8년을 책꽂이에 방치하고 있다가 2025년에 <리틀 라이프> 2권(초판 16쇄)을 사고 나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끔찍한 소문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읽기를 미뤄 왔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 도중에 멈추기는 어려웠다. 이 책은 끔찍하지만, 재미있다. 아름다운 한편, 추악하다. 잔혹하지만, 따뜻하기도 하다. 역겹지만, 뭉클하다. 


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수도원에 버려진다.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의 인종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 모른다.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손에 길러진다. 한 수사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그 수사는 아이에게 성매매를 시킨다. 소아성애자들에게 끝도 없이 유린당한다. 수사의 범행이 발각되고, 수사는 자살한다. 아이는 고아원으로 넘겨진다. 아이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일까. 결코 아니다. 고아원의 직원들이 아이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그 하이에나들은 귀신같이 자신의 먹잇감을 알아본다. 아이는 탈출한다. 아이는 자유를 찾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더 잔혹한 악마에게 걸려든다. 감금된 채 성적 학대를 계속 당한다. 결국 끔찍한 고통사고-아이를 평생 불구로 살게 만든-를 당하고 나서야 아이는 성적 착취와 학대의 굴레에서 간신히 벗어난다.


한 인간의 운명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가. 인생이 이렇게 끔찍해도 되는 것일까. 무신론적 믿음이 강화되려는 순간, 마치 아니야 그래도 신은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또 우주론적으로도 모든 힘이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불행의 에너지와 행운의 에너지가 필연적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듯이, 아이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다. 그는 명문대를 가고(물론 그의 지능과 노력 덕분이지만), 대학에서 평생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 친구들 중 한 명은 그의 평생의 사랑이 되고, 자신을 가르친 교수에게 입양이 되고, 대형 로펌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변호사가 된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아낌없는 사랑과 조건 없는 환대를 베풀어 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절망적인 것은, 한 인간이 이 소설에서처럼 학대당하고 상처받는 일은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또 실제로도 때때로 일어나는 일인 반면, 아이가 사랑과 무조건적 환대, 배려와 공감을 받는 일은 현실에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더욱 절망적이고 아픈 것은, 아이의 주위에 저토록 좋은 사람들-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고,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의 한평생을 지배한 것은 아이를 지배하고 학대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아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 놓은 더러운 상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무엇으로도 상처받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허탈해지는 것이다.


이 책은 가학과 피학으로 얼룩진 잔혹 포르노, 소아성애자들이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유린하는 아동성착취물,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자해를 일삼는 정신병자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혹평을 하는 리뷰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정신이 다소 약하거나 불안정한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위험할 수도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총 1,0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은-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위 평가들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랑과 구원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비록 실패한 구원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무조건적 환대란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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