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공자 노자 석가 - (양장)
모로하시 데쓰지 지음, 심우성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학자인 저자 모로하시 데츠지의 오랜 세월의 공부(이 책은 저자가 100세 때 쓴 것으로 이 책이 출간되던 해에 별세했다고 한다.)가 녹아 들어 있는 이 책은 "진정 제대로 알고 있는 자만이 쉽게 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이 책은 공자와 노자와 석가의 대화체 형식을 띠고 있다. 대화체의 글은 가독성은 뛰어나지만, 글의 내용 전개가 산만하고, 주제에 대한 옹골찬 천착이 어렵다는 단점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대화체의 이러한 단점을 모두 극복하면서 뛰어난 가독성과 독자로 하여금 사고의 반성적, 상승적 전개를 하게끔 유도하는 대화체의 장점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서로 조화하기 어려울 만큼 개성이 강한 세 사람의 사상이 산만하지 않게 잘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세 사람의 사상을 완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뛰어난 내공 덕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공자와 노자와 석가 이 세 성인의 생애에서부터 사상 전반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여기서 이 '폭'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세 성인의 자연관, 인간관, 생사관, 정치관, 형이상학, 핵심개념(공자의 仁, 노자의 無, 석가의 空 등등)을 종횡무진 하면서 쉬우면서도 충실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세 성인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물론 구체적인 전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저자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는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석가의 경우는 <반야심경>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 속에서 세 성인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담긴 원전을 직접 읽을 수있다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것도 엑기스만 말이다! (저자의 원전 인용에 대해서 역자가 역주를 통해서 성실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등급이 올라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읽는 분들은 역주도 꼭 읽어 보시길...)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자와 노자에 비해서 석가의 비중이 좀 작게 처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역시 책 곳곳에서 불교사상에 대해 자신이 없음을 드러내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야심경 같은 경우는 전문을 번역, 해석, 설명하면서 석가의 공사상을 파헤친다. 반야심경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라고 할 때, 불교의 비중이 꼭 작다고만은 할 수 없으리라.)

김용옥신드롬 혹은 작금의 동양학신드롬을 단순히 일회성 유행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이러한 현상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행에 휩쓸리기 보다는 이 시점에서 그리고 (좋은 기회라고도 할 수 있는)이러한 상황에서 냉정하게 동양학 더 나아가 인문학이 나아갈야 할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색은 물론 추상적이고 형식적이어서는 안된다. 글쓰기 방식, 책읽기 방식, 토론의 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과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불안한 유행 속에서 <공자 노자 석가>와 같은 대중에의 접근가능도가 높으면서 내용이 충실한 책을 통해서 위의 고민에 대한 방향을 제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끝맺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차세계대전의 포연이 사라지기 전의 비참하고 음울한 시대상황속에서 쓰여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색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어둡다.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라는 하버마스의 말처럼, 이 책은 무척이나 비관적이다. 이 비관은 단순히 저자들의 기질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들 사유의 철저성이, 근본을 파헤치는 도저한 비판이 이러한 비관을 그리고 어두움을 낳은 것일 뿐이다.

이 책을 말할 때, 먼저 그리고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책의 문체(스타일)이다. 근대와 계몽의 핵심적 코드인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계산가능성, 합리성, 체계성에 대한 비판과 전복은 비단 내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체에 의해서도 수행되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들은 쉽사리 이해의 그물에 포착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문장들은 전체적인 구성과 체계를 파악하기도 어렵게 한다. 자기 이전의 사유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하고자 했던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저자들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개념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미를 집어 넣어 버린다.(가령, 전통형이상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수행했던 하이데거가 그러했듯이.)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이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되고(대부분 오독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내던져지고, 마침내는 쉽게 망각되어 버리는 그다지 소망스럽지 못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형식을 고안했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계몽과 근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제 이 책의 내용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계몽의 변증법>은 단적으로 말해서 역사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 역사에 대한 이해와 감각은 필수적이다. 워낙에 쌓인 것이 많은 "이 늙은 시대"(니체)에 철학을 하는 이들은 반드시 전통과 그들의 선배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은 인류의 정신이 어떻게 출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왔으며, 지금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를, 저 애니미즘의 시대, 신화의 시대로부터 훑어보는 책이다.

자연앞에 맨몸으로 선 인간은 그 자연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 그는 언제 자연에 의해서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그는 살아남기를 원한다.길은 오직 하나.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변칙적인 자연의 움직임을 예측가능한 것으로, 안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 인간은 자연을 개념화한다. 고대에 인간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화이다. 자연은 신이되고 신은 사실상 인간에 다름아니다. 이런 개념적 작업과 동시에 인간은 자연을 실질적으로 정복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가 가능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 바로 "내적자연"에 대한 지배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을 때만,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에 성공할 수 있다.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와 더불어 내적자연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질때, 문명은 성립한다. "문명은 억압이다."(프로이트)

하지만 이 두 지배와 더불어 발생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 곧 "사회적 지배"이다. 문명의 유지는 그저 인간이 모여사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자연지배의 영속을 위해서 인간들은 조직화된다. 인간의 활동은 어떤 체계속에서 조직되고 할당된다. 이 세 지배의 연관, 이것이 "지배의 삼중적 구조연관"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듯 지배로부터 시작된다면, 사실상 신화의 시대도 낭만이란 없다. 이미 신화속에도 근대를 낳은 계몽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파악하는 "근대의 계몽정신"은 어떠한 것인가? 계몽의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해 보자. 우선 계몽은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한다. 이 하나의 기준에 의해서 모든 사물은 심지어 인간마저도 계산되고 교환의 대상이 된다. 계몽정신의 실제적 구현 형태는 "교환"이다. 교환은 등가의 것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가격은 숫자로 매겨진다. 숫자로 매겨질 수 없는 것, 계산불가능한 것은 따라서 배척된다. 숫자에 의해 동일화된 것들은 하나의 체계에 포섭된다. 계몽의 정신의 적나라한 발현을 우리는 "체계"와 "동일성의 원리"에서 본다.

결국 계몽이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지배하고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이 만든 "관리되는 사회"가 아닌가? 저자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이 보여준 광기와 야만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계몽의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계몽은 결국 신화로 추락한다. 처음부터 계몽은 결국 신화였다. 계몽의 자기파괴성이 낳은 결과가 현대사회와 같은 철저하게 "관리되는 사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로, 역사가 시작되던 그 지점으로는 돌아 갈 수는 없다. 반복해서 산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저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비관적인 전망에 갇혀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실제로 이들의 비판을 반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실천의 여지도 사실상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니체가 그랬던가. 너무 많이 그리고 제대로 알아버린 자는 행동하기가 어렵다고.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이론적 반박은 어렵지만, 실천적으로는 반박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저자들이 밝혔듯이, 인간은 어쨌든 자기보존을 해야만 하고, 그 자기보존이 좀더 나은 형태로-구체적으로 말해서 보다 많은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분위기속에서-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낙관적인 전망을 갖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마냥 비관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아도르노는 이런 체계적으로 억압된 상황에 대한 출구로 예술적 사유를 제시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억압의 해소가 가능할는지 몰라도 일상적, 정치적 삶의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의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 現代 韓國의 自生理論 20
교수신문 엮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2000년 1학기 '철학원론' 강의시간에 한국철학이란 무엇이며 도대체 한국철학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를 주제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니는 보편성과 '한국'이 지니는 특수성 혹은 지역성이라는 외견상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념 사이의 충돌에 대해 숙고해 보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두가지 가능한 답이 있을 것이다. 둘을 조화롭게 공존시키거나 아니면 그 충돌을 끝간데 없이 밀어 붙여 둘 중 하나를 파산시키는 것이다.(이 경우 대부분 철학의 보편성을 포기할 것이다.) 전자는 지극히 뻔한 답이 될테고, 후자는 현시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결여한 미숙한 답이 될 것이다.

나는 물론 전자를 선택했다. 사회의 운영체제가 서구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운동을 이해하려면 서구적 인식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또 굳이 '철학'과 '한국'을 대립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사유틀이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면 가져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철학도 여타 학문이나 예술처럼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현상이나 상황의 반응으로 생성된 것이며, 그와 비슷한 상황이 한국에 있다면 서구철학의 적용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4년 전의 저 문제는 결코 좋은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의 전통적 사유의 중압과 서구학문에 대한 어떤 콤플렉스 사이에 끼여서 내지른 자그마한 비명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에 실린 20개의 우리 이론도 역시 이 두 힘의 압력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통사유와 서구이론의 배합 정도에 따라 이 둘을 각각 한 극점으로 하는 이론의 수직선 위에 이 20개의 이론이 배치된다. 좋은 이론과 나쁜 이론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물론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이론은 이 두 힘이 가하는 압력을 뚫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 돌파력을 어디서 얻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제문제에 대한 설명력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뛰어난 설명력을 갖는 이론이 결국 '좋은 우리이론'이 될 수 있다. '이론'을 협소하게 정의해서 어떤 일관된 체계, 창조적 개념어를 이론의 필수요건으로 내세운다면 이 책에서 꼽은 20개 중 어느 것도 이론이 되기는 어렵다. 체계가 다소 엉성하고 개념어를 빌려 왔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이 한 시대를 이해하는 훌륭한 지침이 되었다면, 좋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요즘 학계 일각에서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운동의 움직임이 있는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체계는 서구의 것인데, 개념이 우리의 것이라면(그럴수도 없지만) 이 둘의 엇박자가 만드는 불협화음이 듣기가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의 개념, 서구의 체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창조적인 재생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개념의 내용을 불리고 체계를 변용시킴으로써 말이다.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사상과 철학에 독창적인 것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우리 것에 대한 강박,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 독창성에 대한 집착을 덜어낼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스토리아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절에는 사실을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었다. 여전히 어떤 종류의 사상과 그 사상의 언어화를 억압하는 제도가 정당한 비판속에서도 건재하지만, 이 시대는 말과 언어와 정보의 홍수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또다른 의미에서 알려져야 할 사실이, 드러나야 할 사실이 억압되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잊혀져 가는 사실-그것도 충격적이었고 여전히 충격적인 사실-과 만나는 일이 적지 않게 놀라운 일이 되는 까닭이다.

자유주의자 고종석의 '달력식 역사책'에서 전태일, 김경숙(YH무역사건), 김귀정(91년 5월 항쟁), 박종철(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 이재호, 윤상원, 이한열 등등의 이름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가 자유주의자인 한 역사 속의 오늘 있었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을 기록하는 '달력식 역사책'에 이 사람들이 죽은 날을 잊지 않고 새겨 넣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가 누리는,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저 어둡고 차가웠던 시대를 뜨겁게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저들과 저들의 동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테니 말이다.

개인의 자유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이념을 제외한 모든 이념의 공통분모는 '자유'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의 전선에 직접 참가하지 못했던 자들의 일차적인 도리는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차적인 도리는 어렵사리 얻은 자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흘러가도록 길을 내는 것이다. 이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시절, 나로 하여금 소설가를 꿈꾸게 했던 이청준 바로 그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그 시절에도 느낄 수 있었던 탄탄한 문장과 흥미있는 줄거리, 긴장되는 이야기 전개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했다. 이제 조금 나이를 먹은 탓일까? 이 소설이 문둥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중심에 놓은 단순한 이야기책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문둥이들을 격리시켜 수용해 놓은 곳. 소록도. 이 소록도에 새로운 원장이 부임해 온다. 조백헌. 그는 삶에 지치고 인간에 절망하고 그리하여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만이 가득한 문둥이들에게 새 삶을 주고자 한다. 오욕의 땅 소록도를 문둥이들의 '천국'으로 바꾸는 것. 소록도 앞 바다를 메워 거대한 간척지로 만들어 문둥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내 벽에 부딪친다. 세상에 배신만 당해온 문둥이들은 애당초 조원장의 달콤한 계획을 불신하고 있었다. 정상인인 조원장의 천국건설은 잘 되어봤자 정상인, 즉 '당신들의 천국'일 뿐인 것이다. 그 천국은 결국 문둥이들을 하나의 울타리에 가두어 문둥이의 문둥이됨을 더욱 고착화 시킬 뿐이다.

<당신들의 천국>이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은 인간사에 보편적인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우리사회에서도 여성,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혼혈아 등의 사회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별과 배제라는 비인간적인 시선을 넘어서서 보다 인간적이고 통합된 사회로 가는 길은 어떤 것일까. 작가 이청준은 '믿음'과 '사랑'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사랑의 실현은 측은지심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동물적 욕망과 지배욕을 뛰어 넘을 때만이 가능하다. 믿음과 사랑이 만개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가시덤불 우거진 울타리와 두터운 장벽없는 '우리들의 천국'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