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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트 1 ㅣ Medusa Collection 7
제프 롱 지음, 최필원 옮김 / 시작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디센트, 하강.
묘한 분위기의 표지.
그리고 읽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띠지의 문구들.
나는 호러, 공포물을 보고 나면 뇌에 잔상이 꽤 오랜시간 남는 편이다. 게다가 상상력이 좀 과한 탓에 한 장면을 보고 나면 곧잘 머리속 가득히 끔찍한 상상 나무를 키워버리기 때문에 내가 만든 상상때문에 공포에 질려버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나 꿈도 잘 꾸는지 TV에서 호러영화 홍보하는 한 컷만 보고 나도 밤새 그런 꿈이 똑같이 재생된 적도 여러번이다. 그래서 내 영화 목록에 이런 장르는 거의 0%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난 경우라 해도 말이다.
직접적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 영화도 영화지만, 소설 읽을때면 나는 자동적으로 읽고 있는 그 페이지의 배경이 되는 장면과 상황을 상상해 보며 마구마구 감정을 이입하곤 한다. 이것이 소설을 즐기는 나의 가장 큰 재미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나 진짜 무섭거든? 어디 읽을테면 읽어보지?”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은 <디센트>를 읽겠다고 결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기획되고 있다는 문구는 내 과도한 공포심을 넘을 만큼 소설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그리고 악과 사탄, 지하세계 같은 아주 근본적인 존재들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풀어가고 묘사할까에 대한 궁금증함도 한몫했다.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이다 읽기 시작한 <디센트>. 첫 장면부터 잔뜩 긴장하고 읽어 내려갔다. 어제 사탄의 존재가 드러나는 거야... 어디서 갑자기 등장해 잔학무도함의 극치를 보여줄까...
작가는 역시, 내 생각만큼 단순하고 직설적이지 않았다. 한 가지 스토리에 간신히 적응할때쯤 불친절하게도 전혀 다른 배경의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기억한 채로 다음 이야기를 읽고 다시 저장하는 작업을 내 뇌가 끊임없이 되풀이 해야했다. 내 기억력 상태로는 조금 무리였던 이런 과정이 지나고 나자, 깔려 있던 복선과 인물들의 상황이 그 뒤로부터는 정교한 직물을 짜듯 이리저리 절묘하게 얽히고 이어져 그야말로 박진감 있는 스토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산악인 출신의 모험가라는 화려하고 특이한 전적을 가진 작가의 계산된 의도였던 것도 같다. 에잇! 센스쟁이 같으니라고.
여러 인물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사탄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원색적인 질문을 근원으로 하는 소설이라 전형적일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지 재미를 위한 스토리 전개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악’의 존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한 작가의 의도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였는데, 흔히 내가 생각해오던 지옥이나 사탄, 혹은 그의 하수인(여기서는 ‘헤이’라고 부르는)들에 대한 묘사 들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역시 사람이 소유한 가장 큰 가치 중 하나는 상상력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될 정도로 치밀하고 바로 눈앞에 재현되는 듯한 묘사도 소설에 나를 깊이 몰입하게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자기전에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역시 그저 판타지 소설로만 끝나지 않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 것도 인상 깊었다. 특히 1권 중간부터 등장하는 ‘조사단’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역시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보면 인간세계에 갑자기 출몰해 공포감을 일으키는 지하세계의 존재들보다 더 무섭고 잔혹한건 이미 우리 안에 가득히 자리잡고 있는 욕망, 그 끝도 없고 지칠줄도 모르는 소유욕의 수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 소설은 왠지 현실감이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잘 읽지 않게 되는데 이번 <디센트>로 나는 고정관념 하나를 또 완전히 깨뜨릴 수 있었다. 풍부한 상상력이 가득한 판타지에, 현실감 또한 떨어지지 않는 작가의 치밀함, 그리고 내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에 대해 좀더 깊은 관심을 갖게 해주고 더불어 내 안의 악한 본성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만들어 준 깊이있는 주제들까지, 이 소설 <디센트>는 올해 읽은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 중 인상깊은 책 목록에 꼭 포함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베스트셀러가 될 <디센트>,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그 책 아직 안 읽었어?”라고 의기양양 면박 줄 그날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