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다양한 소설을 읽는 시각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최근까지 소설 출간의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는 바로 거대하게 밀려들어 오는 일본 문학의 물결인 것 같다. 사실 나는 일본문학을 잘 모르기도 했을뿐더러, 고등학교 때 정신없이 좋아했던 어떤 선생님의 영향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본문학, 특히 소설에 대한 좁은 시각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요 근래 많은 일본 작가들을 접하면서 일본 소설이 가진 특유의 문체와 스토리 전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는,정말이지 지금 내 상황을 꼭 집어 주는 이 적절한 속담처럼 나도 자꾸만 자꾸만 일본소설에 빠져들어가는 중이다.


<마리아불임 클리닉의 부활>은 정신없이 닥치는 대로 일본소설을 탐독하던 나에게 무언가 조금 다른, 새로운 종류의 맛을 알게 해준 소설이다. 사실 이전까지 읽은 일본소설은  대충 내게 두어 가지 종류의 맛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티일의 무겁고, 미묘하며 의미심장한 느낌의 축축한 안개같은 맛 하나(물론 그의 에세이는 소설과는 완전 대조적으로 유쾌 발랄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와 무라카미 류의 일부 소설처럼 스릴러와 허를 찌르는 반전의 묘미가 가득한 여러가지 맛이 섞인 톡톡뛰는 상큼발랄한 맛.


그런데 이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은 첫장부터 왠지 만만치가 않았다. 자로잰것 듯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초반부터 눈에 힘을 주게 만든 산부인과 관련 전문 의학용어들은.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땐 꼭꼭 짜여진 치밀한 구조를 보고 있는 것 같았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탓인지 가볍게 읽힐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장치들이 익숙해질때쯤 되자, 나는 곧 스토리에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곰꼼하고 세심한 묘사와 상황에 대한 플롯이 바로 이런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음을 알았다. 중반 이후부터는 어찌나 속도감있게 읽히는지,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밤새도록 읽다가 출근못하고 그대로 기절할까봐 간신히 책을 떼어냈다. (아침에 눈도 못뜨는 나를 보시던 엄마로부터 출근할 애가 정신나갔다는 한소리를 결국 들어야 했으니... 말다했다)

 
<마리아불임 클리닉의 부활>은 분명 말랑말랑한 재미만을 위한 소설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겐 다소 어렵다 느껴질 수도 있고, 저자의 통렬한 사회비판적인 시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진실을 바라봐야 하는 불편함도 있을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늘 말랑말랑 모든게 다 잘될거야, 재미만 있으면 그뿐이지.... 라는, 단지 즐기기만을 권하는 소설보다는 나는 다소 불편하지만,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해 한번쯤 소설의 이야기를 대입하며 "생각"이란걸 해볼 수 있는 이런 류의 소설이 오히려 생각의 힘을 키우고, 작지만 내 고정관념과 사회의 고정관념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이야기는 일본에서 실제 일어났던 한 사건을 모티브로 시작된다. 지방 병원에서 열과 성을 다해 산부인과 업무를 수행하던 한 의사가 만 번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희귀한 상황에 맞닥드리게 되고 누구라도 손을 쓸 수 없었을 그 일로 인해 임산부와 아이가 사망하자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는 우울한 뉴스였다. 그 뉴스를 듣고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거라는 번역자의 추측 끝에는 이 소설이 지향하는 메시지가 어떤 느낌이지 대강 짐작하게 했다.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의 소재가 되는 일본의 산부인과 실태와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사실 일대일로 딱 맞아 떨어지는 유사성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아본 경이로운 경험을 해본 사람으로서, 또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인지를 누구보다도 체험을 통해 절절하게 알고 있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자국의 산부인과 의료 현실을 맹렬하다 싶을 정도로 꼬집는 저자의 마음에 공감이 가고 그 안타까움이 고스란이 내게도 전해진다.
우리나라도 점점 아이를 적게 낳으려고 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것을 내 주변을 돌아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러 아이를 안낳겠다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생긴 아이를 쉽게 떠나보내기도 한다. 저자는 일본에도 불고 있는 이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하얀 거탑에 갇혀 탁상공론을 일삼는 무능한 행정적 방법이 아니라 실질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다소 과격한 대리모 출산이라는 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이 윤리적 논쟁을 가져올 소지가 다분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겁먹으며 시작했던 이 책과의 시간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두가지 선물을 해주었다.

첫째,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소설들과는 또다른 차원의 맛을 느껴주게 했다는 점. 그래서 내 독서의 스펙트럼을 아주 약간일지라도 확장시켜주었다는 점.

둘째, 늘 기쁘게 생각하는 책의 역할이기도 한, 무언가 내게 곰곰히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는 점. 혹 내가 처한 현실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난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꼭 필요한 과정인것 같다.

오랜만에, 쉽진 않지만 다 읽었다고 그냥 덮어두고 싶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 하나를 만난것 같다. 꽤 괜찮은 일본 소설 좀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는다면 망설임없이 그 목록중에 꼭 끼워 소개하게 될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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