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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흔에 관하여
정여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제목과 표지에 끌려 읽었다. 정여울이란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저자 소개에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있다. 심리 치유서 종류일 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보다는 작가 본인의 인생 경험과 그로 인해 깨달은 점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감흥이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제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며 침울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어차피 인생에 서른이든 쉰이든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비슷한 경험들을 한다). 작가는 마흔이란 나이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는 편인 것 같다. 20대, 30대와는 다르게 40대가 되어 생긴 여러 가지 변화들을 이야기한다.
- 마흔은 내게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하고 싶은 일’과 ‘보상이 좋더라도 하지 않으면 더 좋은 일’을 구분할 지혜를 주었다. 마흔을 통과하며 나는 ‘지금 당장 내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사흘 뒤에 내 감정을 추스른 뒤 그 사람을 마주하는 차분함’을 배웠다.
-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제 나이의 무게에 걸맞은 지혜와 용기를 지니기 위해 애쓰는 나날들이 내게는 기적 같은 신비와 축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솔직한 감정 표현이 주는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하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친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매우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예의 바른 완곡어법보다는 정직한 직설화법을 택하게 된다. 심지어 정치나 종교 같은,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인 주제들에 대해서도 솔직해져버렸다.
- 예전에는 거절의 기준점이 나의 바깥, 즉 타인의 인정이나 외부의 시선에 있었다면, 이제는 내 안에 있다.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애쓴다.
- 40대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고, 비로소 ‘그동안 잘못 살아온 시간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흔 즈음은 저마다가 지닌 성격적인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평생의 습관을 기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 마흔은 나에게 예전에 알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 예전에 ‘다 이해했다’고 믿었던 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모든 것에서 끝내 배울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으로 인한 수동적 설렘보다 훨씬 강렬하고 오래가는, 자극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 내 안의 설렘이다. 20대에는 새로운 체험이 두려웠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가 과연 세상의 풍파에 맞서 싸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낯선 체험에 묻어 있는 그 위험과 아픔까지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일 수 있다. 요즘 신간 목록을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아도 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류의 제목들을 단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구성원 모두에게 무한경쟁을 요구하고 성장 일변도의 정책만을 펴온 그동안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사실 이 책도 ‘마흔’이라는 키워드를 떼면 그런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약간은 지루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 소심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 너무 많은 타인의 시선과 강요에 괴로웠던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작은 공감과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