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이야기의 또 다른 이름이고, 그러므로 소설은 필연적으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상황과 다시 한 번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소설의 세계관이 현실과 달라도 상관 없다. 결국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므로. 다양하게 변주된 그들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때 비로소 만족스러운 독서가 완성된다.

 

 <업루티드>의 도입부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동화의 분위기를 품고 있다. 10년마다 소녀를 자신의 탑으로 데려가는 드래곤. 왜 그러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이제는 당연한 행사가 되어버린 그날, 아름다운 소녀 카시아가 아닌 숲을 활보하는 말괄량이 소녀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의 선택을 받음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된다. 니에슈카는 자신이 뽑힌 이유를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그렇게 니에슈카는, 우리는 세계에 도사린 거대한 위협인 '우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된다.

 인간들의 터전을 잠식하며 끊임없이 위협하는 우드를 니에슈카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녀는 어떤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 물음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소설에서 인물들만큼 중요한 건 없을 테니.

 그 중심에는 단연 니에슈카와 카시아가 자리잡고 있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이다. 주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는 뜻이다. 당돌하고 한껏 흐트러지게 자라온 니에슈카와 이상적인 여인으로 길러져야만 했던 두 여인은 '루스의 소환마법'을 통해 서로를 밑바닥까지 공유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동시에 질투했다는 사실을 들킨다. 그럼에도 그 질투를 넘는 애정으로 카시아를 구해낸 니에슈카.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강력한 수호자가 된다. 카시아가 자신에게서 우드의 그림자를 의심할 때마다 니에슈카는 조건 없는 믿음을 준다. 강인한 육식을 갖게 된 카시아는 스스로의 의심에 잠식당하면서도 니에슈카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 본 둘의 끈끈한 관계는 니에슈카와 드래곤 '살칸'의 로맨스마저 압도한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살칸과 달리 초월적인 이해와 소통이 그녀들에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미 있는 타인과 소통할 때 서로에 대해 알아감과 동시에 비로소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니에슈카는 카시아이고 카시아는 니에슈카인 아름다운 모순이 발생한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캐릭터는 마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비극의 조건으로 '주위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일반인이 아니라 고결한 인물이 어떠한 결함에 의해 스스로의 불행을 초래'를 꼽았다(하마르티아). 즉,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최악의 결과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큰 울림을 받는다. 

 솔직히 마렉은 사건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인물이자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답답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골칫덩이다. 하지만 마렉의 입장에 서본다면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왔음을 말이다. 

 그는 거짓을 쫓았지만 그건 모두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객관적인 3자의 시선을 가진 우리들과 달리 어렸을 적 우드에 빼앗긴 소년에 정체되어 있는 그로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보일 리 없다. 그는 그저 어머니의 안위와 사랑을 갈구했을 뿐이고, 그 사실이 그의 죽음을 슬프게 만든다. 끝내 진실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한, 끝에 가서야 왕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소년 마렉.

 

 결국 <업루티드>는 '이해'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부재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우드)를 낳을 수 있는지 소설을 경고한다. 드래곤이 소녀를 데려가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주민들은 그에게 두려움이 아닌 친밀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 더 적은 피해로 우드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우드를 정화할 수 있었던 건 우드를 압도하는 더 거대한 힘이 아니었다. 바로 교감.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정한 교감을 행하기란 무척 어렵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 서는 것이므로. 그것은 '왜'를 묻는 근본적인 행위이자 관심의 표현이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래서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다시,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솔직해지기 위해, 교감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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