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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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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빚은 겨울은 유난히 오래 간다. 그 겨울을 거울이라고 자주 바꿔 부른다. 평온한 척하는 세계의 맨얼굴을 기어이 비추는, 간직해야 할 겨울의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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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1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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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아, 너의 소리가 내 삶에 청아하게 굽이치고 있어. 널 붙잡은 손, 너가 붙잡은 손들에 오랜만에 맞잡은 두 손의 온기가 참 좋아. 바다처럼 푸르게 아득할 너의 삶에, 무대라는 찬란한 섬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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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동물학교 1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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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렌 심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면 동심일 겁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유년기의 빛나는 조각을 독자들에게 건네주죠.

 어른이 되어도 아이를 잃지 않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삶에 책임을 져야 하고, 생각도 많아지고, 어쩌면 계산적인 마음도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어른들의 세계는 삭막해지나 봅니다. 진정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어쩔 줄 모르고 심지어는 친한 사람들에게조차 마음을 숨기게 되죠.

 여기, 말괄량이 동물들의 포근한 저승이 있습니다. 생전에 사람과 관계를 맺은 그들은 다음 생을 인간으로 살기 위해 교육받고 있죠. 그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소통하면 더 좋을지 알 수 있을지도요.

 

1. 친해지는 데는 각자의 속도가 있어요!

 강아지 맷이 울고 있습니다. 고슴도치 카마라가 자기 손을 가시로 찔렀다는군요. 자신을 위협했다고 카마라가 말합니다. 맷은 억울합니다. 단지 가시가 궁금했을 뿐인데 찔렸고, 선생님은 자기의 입장을 제대로 봐주지 않기 때문이죠. 블랭키는 그런 맷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잘 달래주네요. 마음을 추스른 맷이 카마라에게 먼저 사과를 합니다.

 네 입장에서는 위협적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의젓한 사과로 맷은 카마라의 가시를 하나 받게 되죠.

 친해지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적극적인 친구가 있으면 경계심이 많은 친구도 있죠. 상대방은 어떤 사람인지 살피며 급하지 않게 다가간다면, 수월하게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2. 노력을 칭찬합시다~.

 환생동물학교에서는 어엿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생전의 동물적인 습관을 서서히 버려야 합니다.

 고양이 머루는 벽걸이 시계 위에 걸린 셔틀콕을 꺼내기 위해 사물함 위해 물건을 쌓습니다. 위험한 높이지만 고양이인 머루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차 인간화 되어가는 머루의 몸은 고양이의 유연함을 조금 잃었나 봅니다. 머루는 넘어지며 팔을 다치고 말죠.

 선생님은 머루와 친구들에게 도구를 통해 물건을 떨어트리는 법을 알려주기로 합니다. 머루가 대표로 막대기를 쥐고 멋지게! 시계를 부숴버립니다. 머루는 당황하고 우울해합니다. 그런 머루에게 선생님은 괜찮아, 잘했어.’라는 말을 합니다. 고양이인 머루가 사람처럼 막대기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던 노력을 칭찬한 겁니다. 만약 시계를 부쉈다고 혼냈다면 머루는 더더욱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크게 다칠 위험이 있었겠죠. 선천적인 재능보다 직접 노력한 걸 칭찬해준다면 아이들은 세상에 쉽게 꺾이지 않을 겁니다.

 

3. 기꺼이 불편을 나눌게요.

 자꾸 붕대를 푸는 머루는 특단의 조치로 깔때기를 하게 됩니다. 불편해하는 머루에게 사려 깊은 블랭키가 말합니다.

그걸 뺄 순 없으니까 네가 기분 좋아지는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

 친구들은 평소 머루가 좋아하던 소파에 머루를 데려가고, 상자에 넣어주기도 하고, 그 두 개를 합쳐주면서 머루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 합니다. 그럼에도 머루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깔때기라고. 혼자 이러고 있는 거 짜증 나.’

 머루의 말에 이번에도 블랭키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모두가 깔때기를 하는 것이죠. 친구의 불편을 덜어줄 수 없다면 같이 불편을 느끼며 이해해주는 멋진 방법입니다. 새침한 머루도 이번에는 수줍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요.

 

4. 틀린 게 아니야, 다른 거지.

아키 : , 공놀이가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어. 이유가 뭐야?

블랭키 : 아니야, 재미있었으악!

아키 : 아니야!! 뭔가 달랐어.

블랭키 : 사실은, 공놀이보단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난 더 좋은 것 같아. 이상하지? 강아지인데 공놀이를 별로 안 좋아하다니.

아키 : 그랬구나. 전혀 이상하지 않은걸? 우린 모두 다르니까 각자 다른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해! 그리고, 운 좋게도 내가 가만히 앉아 있기 전문가지! 좋은 자리 아는데, 같이 가볼래?

블랭키 : 좋아!!

 

 기분 좋게 흔들리는 블랭키의 꼬리, 따사로운 한낮, 마주 보는 두 친구에게 번지는 미소.

 

5.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속에 있으니까!

 아직까지 뼈다귀를 소중하게 숨기고 보관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순 없습니다. 그들은 어엿한 사람으로 환생하기 위해 생전의 습관을 버려야 하니까요. 아이들이 꽁꽁 숨겨놓은 뼈다귀들은 꾸준히 압수됩니다. 그때 고양이 쯔양이 뼈다귀 모양의 액세서리를 만들어 옵니다. 진짜 뼈다귀가 아니더라도, 그걸 보면 마음속에 언제나 자신만의 뼈다귀가 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강아지 친구들의 꼬리가 신나게 흔들리는군요.

 

 아이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생님과 말괄량이 아이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때묻지 않은 시선과 방법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아이들, 그리고 생전의 주인에 관한 숨겨진 진실 등 다양한 요소가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이 아이들은 당연히 인간으로, 그것도 정말 멋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독자의 역할은 아이들이 어떤과정을 더 겪는지 지켜보고, 응원하고, 자신에게도 적용해보는 걸 겁니다.

 

 이들의 여정을 한낮의 구름과 밤하늘의 별처럼 응원하며 다음 권으로 넘어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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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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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진 세상에서 푹신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필요하셨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곳으로의 여행 같은 것 말이죠.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곳은 고양이와 쥐가 어울리는 마을 <고양이 낸시>입니다.

 

 새하얀 쥐 더거 씨가 문 앞에 놓인 새하얀 아기 고양이, 낸시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쥐와 고양이의 세계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지만, 더거 씨는 기꺼이 낸시를 가족으로 맞이합니다. 털처럼 하얀 더거 씨의 마음은 낸시를 품을 정도로 넓었나 봅니다.

 더거 씨의 직장 동료들도 마음이 넓습니다. 평소에도 서로 깊은 관심을 주고받은 그들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회사를 나오지 않은 더거 씨의 집을 방문하기로 합니다. 지금 더거 씨 하나 때문에 책방을 닫고 가보자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장님 역시 힘차게 같이 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낸시를 발견합니다. 꼬물거리며 우유를 먹는 낸시는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왜냐고요?

 낸시는 귀여우니까요.

 

 영원히 숨길 수 없는 낸시를 그들은 마을에 소개하기로 합니다. 마을의 어른 쥐들은 걱정을 하지만 낸시를 직접 보고는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왜냐고요?

 낸시는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요!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어리지만 자기들보다 큰 낸시를 위해 다양한 도움을 줍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이렇게 온 마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명 한 명이 모여 마을의 분위기를 이루고, 예민한 아이들은 그에 영향을 받으니까요. 이런 동네라면 어느 동물의 아이라도 안심이 될 것 같네요.  

 더거 씨는 꾸준히 도움을 주는 주민들께 감사를 표하면서도 아들 지미가 서운해할 수 있으니 마음만 받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민들은 지미의 선물도 주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합니다. 박탈이 아닌 더 얹어주는 마음. , 이렇게 해결할 수도 있었지, 아마도 당신과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잃어버린 마음일 겁니다.

 어른들은 낸시가 고양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숨기지만, 지미를 비롯한 영특한 몇 명의 아이들은 낸시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낸시가 낸시라는 이유로 따돌림당하지 않게 지킵니다. 백과사전의 고양이 부분을 우물우물 씹는 지미를 보고는 같이 씹고 삼키는 모습은 얼마나 애틋한가요. 대가 없는 선의, 그저 함께 하고픈 마음이 아이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거겠죠.

 우리는 서로를 보는 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스치듯, 멍하니 보는 게 아니라 강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서로를 진득하게 보지 못합니다. 낸시를 마주한 헥터처럼요. 그는 낸시를 위험하다 판단하고 그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힙니다. 그에게 낸시는 그저 고양이에 불과하니까요.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가까이서 책을 보곤 했다며, 고양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책을 든 아들의 손을 슬며시 내려줍니다. 훨씬 잘 보이지?라며 웃는 그의 뒤로 낸시가 지미를 도와 나뭇가지에 걸린 풍선을 내리는 모습이 보이네요. 봄처럼 따스한 장면이지만, 헥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버지가 엉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우연히 헥터의 계획(마을 사람들에게 낸시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을 알아챈 꼬마 쥐는 친구들에게 낸시가 고양이라 밝히고 함께 낸시를 지키자고 합니다. 유쾌한 아이들의 소란이 지나가자 꼬마들은 당연히 지킬 거라 약속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계산도 필요하지 않은 관계, 친구니까요.

 그들은 헥터에게 낸시의 장점과 위험하지 않음을 천진난만하게 증명합니다. 낸시가 친구들에게 베푼 도움, 낸시 꼬리의 부드러움, 그리고 지미가 위험에 처하자 허둥지둥하던 자신과 달리 망설임 없이 뛰어든 낸시를 보고는 비로소 헥터도 낸시가 고앙이면서도 낸시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고양이인 낸시만 보느라 다른 낸시들은 못 봤어요.’

 헥터는 제대로 낸시를 마주하게 되고, 다음에 마을로 돌아올 때 낸시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즐겁게 고민하게 되죠.

 

 낸시는 고양이입니다. 그러면서도 낸시이기도 하죠. 낸시는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상처받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낸시, 고양이이자 낸시인 낸시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과 배려해주는 마을 어른들 덕분에 말이죠. 마을 쥐 모두가 서로의 든든한 조력자입니다. 설사 깜짝 놀랄 일이 생겨도 그들은 유쾌한 소란과 함께 잘 헤쳐나갈 겁니다. 서로를 왜곡하며 보지 않으니까요.

고양이와 쥐의 공생을 그린 엘렌 심은 동심을 유지한 작가입니다. 소중한 마음을 간직한 채로 작가는 오염되지 않은 시절을 독자에게 다시 선사합니다. 남몰래 다시 아이이기를 꿈꾸는 독자들은 따스한 난로가 있는 오두막을 방문한 것처럼 아늑한 기분을 느끼겠죠.

 책을 덮은 후 독자들은 소망을 하나 품게 될 겁니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조화를 이루고, 기꺼이 배려하기로 한다면 어른이어도 다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의 정원 <고양이 낸시>로의 여행을 이만 마칩니다. 오늘은 푹신한 꿈을 꾸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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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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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랬다. 인생은 자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끝없는 로드무비라고.

    

<일상과 균열의 랑데부>

 여기 탁스함이 있다. 잠시 들르는 사람도 없는데 묵을 수 있는 숙소마다 방 없음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인근 마을에서조차 걸어가려면 한참 걸릴 만큼 접근하기 쉬운 마을이 아니다. 공항에 인접한 탁스함의 도로들에 로저라는 인물은 눈게서와 콜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를 향하던 첫 시험 비행 중 대서양 상공에서 실종된 두 비행사의 이름이다. 이쯤 되면 탁스함이 어떤 곳인지 감이 올 것이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육지 위의 섬.

 그 섬 같은 마을에 약사가 산다. 약국의 이름은 독수리 약국. 드높은 하늘을 활강하는 이름과 달리 그의 일상은 탁스함스럽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약국으로 태엽 인형처럼 출근한다. 약국 밖에서 약사와 고객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리 위의 그들은 서로가 섬처럼 아득하다.

 '내 직업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분리와 제거에요. 약장이 아니라 인체에 빈자리를 마련하는 거죠. 빈자리 마련하기와 물꼬 트기.'

 약사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환자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는 적용하지 못한다그는 아들을 내쫓았던 과거를 품고 10년이 넘도록 아내와 각방을 쓰는 현재를 산다. 아무 문제 없다고, 부인과의 일상이 평온하다 말하지만, 아내가 여행을 떠나자 약사는 혹여 그녀가 남긴 메모가 있진 않을까 집을 탐색한다.

 미련이라는 각질은 떨어져 나갈 듯하다가 시간을 양분 삼아 살이 된 척한다. 그리고 서서히 일상에 금을 낸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상실의 자리가 몸보다 커졌다. 오랜 습관과 리듬으로 굳어 버린 몸으로는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병들었고, 몸에 깃든 고통을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온몸 퍼진 균열을 탈피해야만 한다.

 쨍-

 뭔가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약사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여행자가 된다>

 ‘습격이었다면, 내 조상들이 감행한 걸 거요. 하여튼 그 일격 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주위에서 조상들의 냄새를 맡았거든요.’

 약사는 이런 순간-내일을 오늘과 같이 살 수 없는 순간-이 오리란 걸 예상했듯이 말한다.

 삶이란 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과정을 복잡하게 하는 건 주변 환경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몫도 크다. 왜냐하면 삶은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 수많은 후회.

 후회는 미련을 낳고 그렇게 우리는 과거에 묶인 채로 현실을 유보하듯 산다. 하지만 본능은 알고 있다. 과거는 미래를 밝힐 등불이 돼야지 미래를 태우는 횃불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언제까지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나아갈 순 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과거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기회가 찾아온다.

 약사에게 그 순간은 습격이라 칭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는 비가 내리는 내내 쓰러져 있었지만 젖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투덜거릴 독자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 이야기는 탁스함의 약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환상적인 요소도 깃들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약사지만 듣는 것은 청자(=독자). ‘아무도 이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이가 바꿀 순 없다 하여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다. 무엇을 능동적으로 발견할 것인지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습격 이후, 위기의식과 오한에 떨며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던 탁스함의 약사는 실어증을 통해 그동안 쌓여 있기만 했던 또 다른 욕구에 눈을 뜨고, 그것이 해소되기를 갈구한다. 그건 삶의 타성에 대한 저항이고, 너무나 익숙해진 삶을 다시 살기 위해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다. 이 욕구가 사그라들기 전까지 그는 돌아갈 수 없다. 그는 탁스함에서 계속 멀어질 것이다. 멀어지면서 그는 삶에 새로이 가까워지리라.

 약사는 영광의 자리를 쫓는 스키 선수와,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시인과 함께 훌쩍 여행을 떠난다. 일련의 과정에선 그 어떤 의문도 끼어들지 않는다. 이미 약사는 기존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영역으로 넘어갔고, 그곳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짙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들은 비를 피하며 밤을 보내기 위해 승리자여인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나를 사랑할 권리가 있다>

 남편을 잃은 승리자와 시차를 두고 부인과 마주치지 않는 약사. 묘하게 닮은 꼴인 그들. 한 밤중에 그녀는 황홀경에 빠지거나, 성령에 은혜 입은 자의 눈빛으로 약사를 응시하다 흠씬 두들겨 팬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강렬한 한밤의 습격 이후 그녀는 약사의 시야에 자꾸 포착되기 시작한다.

 소설을 재독하며 나는 이 이야기가 세 남자의 여행담이라기보다는 약사의 필생의 추격담, 아니 본인 말대로 사랑 이야기라고 결론 내렸다. 그가 추격하는 승리자 여인은 약사의 은유다. 그의 추격담은 한 번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는 그녀를, 삶을 응시하기 위한 여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행은 약사의 아내의 쪽지를 단서로 산타페 마을에 도착한다. 시인의 기억과 너무도 달라진 마을에서, 약사는 마을만큼 달라진 자신의 아들을 마주한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절도를 저지른 아들이 이번에는 가장 싫어하는 족속인 집시가 되어 나타났다.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는 아들에게 알은체를 하지 못한다.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날 밤, 갑자기 나타난 승리자 여인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의 주위를 빙빙 맴돌면서, 널 없애버리겠다는 듯 그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본다. 그러고는 사라진다.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책망이 그녀를 통해 전달된다.

 약사는 한동안 일을 하며 마을에 머문다. 아들을 또다시 허망하게 놓친 그는 몰두할 게 필요하다. 언젠가 다시 대면할 화해의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다듬어야 한다. 그동안 승리자는 스텝 지역 변두리의 판자 건물에서 다시 순결해질 때까지 누워 있는다. 완전히 새로울 순 없겠지만, 그들은 비슷한 리듬으로 다음을 기약한다

 어느 순간 시인과 스키 선수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약사와 마을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진다. 그들에게 망설임 없이 차를 넘겨준 약사는 오롯이 승리자를 추적하기로 한다.

 '아마 사람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추적해 찾아내는 일 자체에 열을 올렸던 거겠죠.'

 그의 말처럼 승리자(=자신)를 추적하는 건 결과가 될 수 없다. 끝없는 과정으로 겨우 가까워질 따름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이다. 쉽게 잊히고, 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라서, 나를 잃어버리고 만다.

 '바로 그녀가 내게는 너무나 강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오히려 순간순간 그녀를 잊을 수 있었던 거요. 그녀를 찾는 일이 너무나 중대하고 절박했기에, 내 의식은 가끔씩 그녀를 더 이상 담아 둘 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라는 과정에서 대부분 실패자다. 약사는 일상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가끔씩 모든 게 부족한 감각이 찾아온다. 그 감각을 통해 현재와 하루를 되돌아보고 무언가 다른 걸 경험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을 감각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에야 찰나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사바나의 언덕 위에서 약사는 다시 한번 아들을 만난다. 이번에는 제대로 대면한다. 아들이 떠나고 후드득 떨어지는 밤, 승리자가 등장하여 그는 지금 한계에 다다랐다고,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옭아매던 오랜 매듭-아들과의 화해-을 풀자 약사는 처음으로 승리자 여인을 정면으로 본다. 그녀를, 삶을, 자신을 제대로 대면하는 순간이다. 그는 다시 말을 하고, 그들은 부둥켜안는다. 여인은 고백한다. 다시 한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면, 첫눈에 보자마자 마구 두드려 패줄 거라고. 나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용납할 수 없는 과거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가장 큰 가해자다. 그럼에도 결국 부둥켜안게 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약사는 집으로 돌아온다. 시인과 스키 선수에게 준 그의 자동차가 방금 막 세워 두기라도 한 것처럼 엔진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집 앞에 서 있다. 멀리 떠나 되돌아온 이곳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다시, 삶이다

 

 

<Merry Christmas, Mr. 탁스함 약사>

 그렇게 그의 여행이 끝났다. 돌아오면 딴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 맹세했지만 발이 커져 새 신발을 산 게 바뀐 것의 전부라고 한다. 여행은 끝이 났으나, 그건 그저 인생의 한 챕터일 뿐이다. 막다른 곳이라 생각이 들 때 옆에 조그만 골목이 이어지듯, 삶은 이어진다

 탁스함에 겨울이 찾아온다. 한 해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계절을 거니는 약사와 의 머리 위로 첫눈이 내린다. 약사는 소리 지르는 까마귀에게 말한다.

 ‘마냥 깍깍거리고 울부짖어라, 까마귀야!’

 그리고 덧붙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너가 다른 짓도 할 수 있다는걸.’

 단지 발이 커진 약사의 그 말이 내 마음에 첫눈을 뿌린다. 여행으로 한순간에 사람이 진화에 가까운 변화를 겪는 건 푸르른 꿈이다. 다만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있던 삶의 어느 진리를 오롯이 감각할 수는 있겠지.

 멀어져 가는 약사를 몰래 배웅하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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