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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 사업이라는 것은 설 땅을 잃고 모세에 태어날 당시의 역사적 조건 속으로 사라져버리겠죠. 정신장애자의 공급이 끊겨서 상담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공황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제 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힘에 따라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들은 말라죽어 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따고 썰고 요리하는 일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전문 음식 사업이 대폭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상당 부분도 사라져 버릴겁니다. 의류 산업과 학교 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37쪽)

의존성? 의존성이 무엇이고, 누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심어준단 말인가? 의존성에 기댄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이 오늘날인가? 왜냐하면 오늘은 상업 오락과 넘쳐나고, 패스트푸드점이 읍내에 까지 터를 잡고,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무수한 언어가 병이라며 '은유로서의 질병'을 구축한다. 의존성, 이는 무엇이며 이런 헤게모니를 만들어내는 이는 누구이며, 왜 이런 헤게모니가 존재해야 하는가?

지은이는 학교의 병을 실제적으로 접근하여, 어린이들이 자라나서 의존성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가 만든 패러다임 속으로 이끌려간다고 말한다. 오늘 학교 공부를 받은 아이들은, 당신네들은 행복한가라고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우리는 행복한가?

학교는 이렇게 태어났다.
학교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는 나폴레옹의 전쟁에 진 프러시아가 국민(!)을 일치단결(!)하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즉 학교를 만들어 중앙통제의 교육을 통해, 일사분란한 사고를 만들기 위함이였다.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지 않나요. 왠지 전체주의가 겹쳐지지 않나요?)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한 현대 의무교육은 중앙 집권화한 학교가 어떤 사람들을 길러낼 것인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55쪽)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태어난 근대 교육은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그 전에 있던 독립된 인간 대신에 국가 사회주의의 이념에 충실한 인간을 길러낸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신-독립된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프러시아의 교육을 받아들이면서 의존성으로 변질 되었다고 한다.

"프러시아의 국민학교 목표는 '지성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56쪽)

현장에 가 보니.

그는 기존의 교육 체계-국가 사회주의의 실현에 충실한 교육의 선각자로서, 학생의 수준을 산모양(山)으로 그려 천재는 몇 몇 선택 받은 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6년을 현장에서 지켜본 그는 천재의 분포가 산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죠. 아이들은 모두가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先生)은 아이들의 이런 천재성을 가둔다. 즉 『바보만들기』라는 헤게모니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은이는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고, 그가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가 본 교육, 즉 그가 행한 스무 여섯해 동안의 교육이라는 헤게모니는…

1. 혼란.
저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입니다.

2. 교실에 갇혀 있기.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있는 곳은 교실 안이니 그곳에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3. 종소리.
종소리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일도 끝낼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동그라미 곱표, 미소와 찌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박탈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5. 지적 의존성.

6. 조건부 자신감
시험과 성정, 통치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가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 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7. 숨을 곳이 아무데도 없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항상 감시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희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른쪽을 걷다 왼쪽을 보게 되니, 전혀 새로운 모습이 다가왔고 그는 하나하나 무엇이 문제인가 살피게 된다. 즉 미국의 오늘날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인 셈이죠.

문제에 대해 전전긍긍하다, 그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답을 찾는다. 즉 우리가 자연스레 몸에 익혔지만 학교라는 울타리가 아닌 곳에서 배웠기에, 공부라고 인지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이어져 온 곳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마음은 모농가헬라를 영원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자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어린아이들 때부터 제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통해 일하는 법을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그 창과 그 강가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한 일상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모험을 빚어내고 찾아낼 줄 알게 되었던 곳" (87쪽)

즉 지은이는 스스로 알지 못하지만, 모농가헬라에서 사람 사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을 들어가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자립성과 주체성 대신에 의존성을 배우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에서 익히는 법은 공부가 아니며, 학교가 있는 담장 안에서 배우는 것 만이 공부라는 이분법 만이 존재한다. 우스개소리로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사회에서 잘 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은 웃음 속에 가시가 있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공부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가? 학교를 움직이는 헤게모니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지은이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의 의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 아이들의 재능을 인지하고,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체성을 가지도록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연설문을 기초로 한 것이기에, 연구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지만 자칫, 감정이 앞서는 것이 아닐까라는 조바심이 든다. 교육 이데올로기를 넘기 위해서는 그 실체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 해 전 늙은 선생 한 명 자르면, Œ은 선생 두 명 쓸 수 있다는 것과 작은 시골 학교는 한 군데로 뭉쳐야 한다는 시장 논리는, 교육을 돈과 맞바꿨다는 것 외에 중앙통제를 통한 의존성의 강화, 이를 통해 지배계급의 장기 집권화라는 헤게모니가 숨어있다. 시골 학교의 공기, 늙은 선생의 혜안은 몇 푼의 지식과 돈으로 바꿀 수가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화는 중앙시멘트이다. 서울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모든 문제는 서울에 향하고, 모든 길은 시멘트로 뒤덮어 버린다. 즉 풀 한 포기 심을 공간을 주지 않고,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저버리는 사회화. 이렇게 미친듯이 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큰 일을 앞장서고 있다고 하면 비약이 심할 것일까?

지은이의 모농가헬라는 이미 몇 군데에서 비춰졌다. 『오래된 미래』 라다크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은 나무가 사는 동네, 『산골마을 작은학교』에 숨어 있는 산골 동네, 하지만 힘의 논리에 밀리는 그 작음이 쉬리 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스무여섯해를 가르치면서 느낀 감정과 비판이기에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의존성을 통한 중앙집권화라는 헤게모니는 공통점을 지닌다. 스스로에 대한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어느 나라에, 공무원 시험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소리가 봄바람에 날리더라.

그렇군, 의존성의 획득, 중앙 집권화, 공무원이라는 삼박자의 순환구조. 과연 이 나라를 비판하고 견제할 젊은 머리는 어디로 가는가? 의존성의 마지막 종점은 중앙 집권화와 공무원의 양성인가?

점심에 뱀다리(蛇足)를 탕으로 먹었더니…. 말이 많아 지네요.

학교에서 번호가 지배하는 힘은 강하다. 오늘 며칠이지.. 3번, 3번 읽어봐!!

쉰 명의 아이를 모아놓고 선생은 개개인의 인격체를 인식하지 않고 콩나물의 숫자 세듯 한다. 그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학습을 이해하고 따라오는, 즉 선생으로서의 일을 다 함에 있다. 내가 먼저 간 길이기에 너희는 따라와야 한다는 논리. 한 숭고한 생명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말에 대한 이해를 잘 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고, 피그말리온 효과를 던져주는 학습은 공부를 못 하는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즉 스스로 삶에 대한 책임성을 키워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다. 아울러 이 번호의 편리성은 공통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반을 가든 2반을 가든, 1학년을 가든 2학년을 가든 오늘의 날짜는 몇 일이지로 다 해결된다. 오늘도 열심히 부르는 선생은 아이들의 개성을 익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려 하지 않고 쉽게 번호를 부른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번호는 관료와 중앙 통제 집권에 아주 효율적인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홀로 떠들면서, 지방 정부의 비리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지방 정부의 모순과 힘겨움 등을 지가 살아서 하겠다는 논리는 『바보 반들기』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즉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물론 여기에는 옆 당에 대한, 정략적 발언일 수 있지만 그의 세계관은 좁다.

이미 대한민국은 1국가 2공화국이 아닌가! 선생의 자리와 대통령의 자리는 언뜻 닮은 곳이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같도록 하는 점에 대해서… 그렇기에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였다. 대통령의 자리도, 먼 미래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과의 조우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보 만들기』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 즉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지는 강압적 암기가 현 교육체계에 존재한다고 말하면… 나는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오늘날의 교육을 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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