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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ㅣ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정신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의 4번째 이야기.
『겨울장면』은 주인공 R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이야기이다. 싹둑싹둑 잘려 질서없이 너저분하게 억지로 끼워 맞춘듯 한 기억 속을, R은 헤맨다.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들 중 어떠한 것은 전혀 알 수 없기도 하고, 처음보는 사진과 메모가 발견되고, 거리에서 처음 보지만 낯익은 얼굴이 스쳐가기도 한다. 사라진 아내의 화장대, 기억 못하는 자켓.
"R은 8개월 전 미끄러져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10~11p)
R의 기억이 잘려나간 것은 추락사고로 발생한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R은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해 그날 발목이 찢기고 꺾였다. 하지만 그 사고가 남긴 것은 발목의 상처뿐만이 아닌 것이었다. R의 기억은 사라졌고, R의 주변에는 그 스스로 알지 못하는 R의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망각뿐만이 아니었다. R의 기억은 망각과 더불어 무언가 잘못 이어져 붙여진 것 같다.
예를들어 회사 동료인 L.
R은 일요일 오후 4시, L의 부고를 듣고 아내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R은 그날 장례식장으로 빠져나와 아내와 함께 집에서 카레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 L에게서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죽은 L에게. R은 밤새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았다.(64p)
하지만 그 혼란의 기억 속에서 진정으로 R이 잊은 것, 잘못 이어 붙인 것, 찾아내야 하는 것, 직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내'이다. R의 아내는 곁에 있다가도 뒤돌아서면 사라진다.
R의 아내가 태아난 곳인 제인해변에서 둘은 막대 폭죽 다섯 개를 사고, 횟집으로 들어가 세꼬시를 먹는다. 우연히 들어간 횢집, 아내의 동창이 운영하는 횟집. R과 아내는 어깨동무를 하고 해변을 걷는다. 허벅지까지 젖을 만큼 바다에 들어가 그 둘은 걸었다.
R이 눈을 뜬건 차가운 모랫바닥이었다. 아내는 옆에 없었다. 모랫바닥에는 빈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R이 잊어버린 것은 아내였을 것이다.
사실 그리 친절한 글은 아니여서 난해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R의 기억 혼란처럼 잘리고 붙여지고 어그러진 글이다. 글은 돌고 돌아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R의 사고가 일어났던 순간에서 시작해 다시 R이 깊은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글처럼 기억은 돌고 돈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내의 부재이다. 과연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정답은 없다.
R의 기억이 도려내지고,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R은 기 전화번호 뒷자리가 아내의 5년 전 전화번호였던 것을 기억해낸다. 어쩌면 R과 아내는 이미 5년 전에 이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내와의 이별은 그저 그런 이혼일까, 혹은 사별일까.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얼음호수 앞에서 먼저 가라고 말하는 R, 얼음호수에서 사라진 아내. 어쩌면 아내는 이미 죽은 걸까.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망상인지 정말 알 수 없는 글이다. 정말 R은 추락했고, 발목을 다쳤고, 머리를 다쳤나? 발목 진료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의사는 R에게 말한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어쩌면 그 병원은 정형외과가 아닌 정신과였을지도 모른다.
"R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을 때 복도는 끝이 난 마지막 장면처럼 눈부셨다. "(67p)
난해하고 난해해서 그저 흘러가는 듯이 읽어야 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