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애인에게
현상현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때론 당신 생각에 울음마저 사리물고 싶은 밤이 있습니다."


책 표지를 보자마자 이건 내 책이다, 하고 생각했다. 아아, 어쩜 이런 감성을 자극하는 글인지. 

예쁜 글은 좋다. 신기하지, 읽기만 해도 마음 아리고 코끝 찡해지는 그런 마법이 글에 담겨있다는 것이.


책 앞날개에는 흔히 그렇듯 작가 소개가 쓰여져 있다. 그저 구구절절 내용이 아닌 아주 짤막하고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소개글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쓰려다가 결국 모든 걸 부정확하게 써버리는 사람. 뚜렷하게 정의 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며 그 점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작가 소개글은 작가 본인이 쓰는 것일까? 뭔가 무척이나 문학의 향기가 짙은 소개다.


책은 그렇게 두껍지 않다. 하루, 아니 몇 시간 만에 후딱 읽고 덮을 수 있는 그런 두께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데 꽤나 많은 날을 소모했다.

​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하여 한 순간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책도 있고, 이와 반대로 천천히 읽어야 그 가치가 더욱 더 높아지는 책이 있다. 『이름 없는 애인에게』는 후자이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글자를 공중으로 날려버리는 것이 아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몸속으로 삼켜야 하는 글인 것이다.

​

그래서 지하철에서 한 두장, 자기 전에 한 두장, 또 다른 책을 읽다 한 두장 넘기며 천천히 읽어갔다. '현상현 사색집'이라고 표현한 것이 딱 맞는 것 같다. 사색하는 것 처럼 깊게, 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게 천천히. 조금 느려져야 하는 책이다.


"

윤.

먼 훗날 나를 읽게 된다면

너는 잠시 울어줄까.

-33p「페이지」

"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

읽으면서 아,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먼 훗날 나를 읽게 된다면 너는 잠시 울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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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좋은 글들, 마음에 남아있는 글들이 많다. 필사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편의 시집이라고 표현해도 좋지 않을까.

요즘은 필사하는 사람들도 많고, 좋은 글귀를 수집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마 그분들에게는 이 책은 정말 보석과도 같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그 여름 회벽 담장을 붉게 물들이던 장미 덩굴처럼 너에게 가야지. 짓궂게도 거친 이 한겨울의 북풍을 잠재우고 소용없이 슬픈 춤만 추는 저 빨간 구두는 벗어 던지고, 열사와 냉해에 마르고 젖은 발이 입자 여린 물안개로 스러진대도 너에게로 가야지.
- P19

부드러운 말들로 나를 길들이지 말아 줘 나를 마지막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면 차라리 어떤 이름도 내어 주지 말고 아침이 와도 그림자 하나 남기지 말아 줘.
- P24

S. 앞으로도 이 편지는 기어코 살아남아 내 좁은 서랍 속으로 되돌아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네 흰 얼굴을 닮은 햇살 한 조각쯤은 묻혀 오겠지.
- P59

너는 장밋빛 고운 혈색으로 뺨을 붉히며 우리 보름달 아래 저 냇가로 산책가자 속삭이지. 교묘하고 산뜻하게 내 온생을 흘리려 들지.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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