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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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읽는 책이라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알지 못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의 차례부분에 적힌 심진경 문학평론가의 평론 「'진짜 페미니즘'을 넘어서」 라는 제목을 보고, 아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짐작을 했으며 나에게 어렵거나 찜찜하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겠구나 생각을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는가. 여성임에도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나도 모르게 기피하게 된다.

처음 시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해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해미의 미용실은 2년 전부터 새로운 고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미리 30만원의 예치금을 받아 할인을 제공하고, 손님들의 머리가 언제 자라고 언제 받은 시술이 풀릴지 관리할 타이밍도 카카오톡으로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해미는 문득 생각한다. 언제나 아이와 함께 방문하던 손님은 8개월 전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지 않고 있다. 심각하게 말수가 없고 어려운 책을 읽던 손님. 해미는 그 손님에게 자신의 인생 소설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오질 않는다. 책이 별로였나? 해미는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 소설이 대중들에게 유혹적이지 않는 마이너한 취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는 안 올 만큼 그렇게 별로였던 것일까? 하지만 자신과 안 맞을 수도 있지 미용실에 오지 않으며 이렇게 티를 팍팍 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독특한 취향을 고집하는 미용사 해미의 이야기 바로 뒤로 은정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은정은 해미의 이야기에서 나온 '심각하게 말수가 없고 어려운 책을 읽던 손님'이다. 은정은 영화 홍보 회사에 다니며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다. 은정은 학부모들의 모임을 영양가 없는 인간관계라 치부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철저하게 배제시켰고, 자신의 경력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던 인물이다. 8개월 전에도 그래서 그랬다. 은정의 회사가 홍보를 담당했던 영화의 흥행 성적이 예상보다 좋지 않아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보통때면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면 일주일 정도 쉬거나 남편과 교대로 휴식을 취하며 돌보는데 이번에는 그럴 틈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시부모님에게 맡겼다. 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 교회 수련회에 갔고,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8개월 째 눈을 뜨지 못했다.

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해미의 미용실에서 일하는 지현의 이야기. 은정의 아들 서균과 같은 반인 율아 엄마 진경의 이야기. 진경과 함께 교련 수업을 받았던 세연의 이야기. 진경의 지인인 포토그래퍼인 윤슬, 교수 성추행을 고발한 채이와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던 교수 경혜. 채이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형은, 형은의 엄마 효령과 효령의 직장 선배였던 명옥.

인물들에게 얽혀져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된듯, 연결되지 않은 듯 이어붙어 있는 형식으로 서사가 전개되어 간다. 그들의 성격도, 나이도, 취향도, 더 나아가 결혼의 유무나 살아온 습성 같은 것도 통일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는 남성이 없다.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여성이 말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직 소설속에만 수렴된 것이 아닌,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형태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페미니즘'을 놓고 보통 남성과 여성의 대립 형태를 떠올렸는데, 생각해 보면 페미니즘을 대하는 여성들 속에서도 또 다시 대립이 형성된다. 기혼녀와 비혼녀, 전업주부와 워킹맘. 화장을 걷어내며 탈코르셋을 외치는 인물들이 있기도 하며, 미용과 화장으로 가꾸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여성의 기회와 평등. 일단 유전자 적으로 XX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혹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는 '페미니즘'은 조금 꺼려지게 다가오는 단어이다. 페미니즘을 동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의내릴 수 없음에서 오는 위화감 때문이다. 과연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이런 점에 대해서 어쩌면 나는 소설 속의 '지현'과 가장 비슷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37p

지현은 해미의 미용실에서 일하는 미용사다. 오랫동안 이 직업을 꿈꾸었고, 누구도 응원해 주지 않는 외길에서 엄청난 노력끝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화장 콘텐츠를 올리지 않겠다 선언한 뷰티 유튜버를 보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에서 진로를 바꾸는 학생들을 보고, 머리 자르는 것을 남자친구에게 허락받는 여성을 보고 지현은 자신의 직업을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성별의 평등을 외치는 자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뒤흔들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페미니즘을 기피하는 이유가 그 혼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 막고 눈 감는 꼴일지도.

그럼에도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이 있지 않을까. 성향과 성격, 가치기준과 생각이 달라 서로 비난하고 할퀴어도, 결국 이해해 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을. 정말 놀랍게도 신비롭고 복잡한 XY염색체의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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