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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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 출판사의 새로운 경장편 시리즈 '소설Q'. 이 시리즈의 첫 시작을 최진영 작가의 《이제야 언니에게》가 알리게 되었다.

《이제야 언니에게》는 본래 2017년 10월에서 12월까지 『문학3』 문학웹에서 연재했던 이야기지만, 2019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다시 쓰여져 소설Q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처음 책의 제목을 접하고 '이제야 언니에게? 언니와 대판 싸운 동생이 언니를 생각하며 서술한 이야기일까?' 하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제야'이며, 일기형식으로 전개되는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가 쓰여진 날짜를 보며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가 쉬웠으며, 제야의 일기이기 때문에 제야가 겪은 일, 생각, 감정 들이 뚜렸하게 나타나 있다.

책의 시작은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일기로 시작한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끔찍한, 이라는 말에는 가로선이 그어져 있다. 첫 시작부터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리고 무언가 두렵고 불안한 느낌을 주는 일기의 한 페이지로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일기의 날짜를 의식하며 2008년 7월 14일을 쫓게 되었다. 그 날, 제야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 마냥.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평화롭던 유년 시절의 이야기, 2부는 닥쳐온 비극, 3부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살고자 하는 제야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그 비극을, 제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던 2008년 7월 14일의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실 언급하고 싶지 않다. 소설로 접하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을 그 이야기를, 과연 그저 한 권의 책 속에 등장한 내용일 뿐이라 치부하고 멋대로 끄집어내도 괜찮은 것일까. 현실과 맞닿아 있는 내용을 다룬 책은 이래서 어렵다. 나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종이 몇장을 넘기면 끝날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을 때 까지 쫓아오는 악몽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일단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제야의 악몽을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제야는 착한 아이었다. 착하다, 착하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 얌전한것, 어른에게 순종적인 것, 고분고분한것? 만약 이에 해당하는 것이 '착하다'라는 수식어를 설명한다면 정말로 제야는 착한 아이었다. 제야는 언제나 주변을 잘 파악하며 자신의 행동도 잘 처진한다. 튀지 않게, 조용하게. 제야 스스로도 어른에게 싫다고 말하는 것이 무례한 행동처럼 느껴진다고 말 할 정도로 틀에 박한 '착함' 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언제나 제야의 손에 두둑히 용돈을 쥐어주던 당숙은 동네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고, 또한 제야의 집에 들어오는 돈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야는 언제나 당숙이 불편했지만, 잘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자신들의 아지트였던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제니와 승호를 만나기로 했다. 담배 한대 피며 제니와 승호를 기다리던 제야는 그곳에서 당숙을 마주쳤다. 당숙은 제야에게 담배 한보루와 맥주를 주었다. 그리고 성폭행 했다.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다. 제니를 지키고 싶었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109p

제야는 혹 당숙이 제니에게도 같은 짓을 할까봐 스스로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찾아갔다. 하지만 부모와 친척들은 제야에게 없던 일로 하라고, 합의하자고 제야보다는 당숙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을 했고 제야는 가족과 주변 어른, 친구들로 부터 경멸 어린 시선을 받게 된다. 제야는 한순간에 성폭행 피해자에서 돈 많은 사람을 홀려 먹은 꽃뱀이 되었다.

제야는 사람들의 시선과 거짓으로 뒤덮인 소문을 피해 이모가 살고 있는 강릉으로 쫓겨나가듯 떠났다. 이모의 걱정 아래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제야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으며 기대고 있던 베개에 주먹질을 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짜증이나고 화가나고 경멸스러우며 슬펐다. 그 어떤 이들이 이 이야기를 읽으며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가 제야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있을까.

책 속 인물인 제야의 편에 서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왜 그것이 쉽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이 책은 제야의 이야기지만, 모든 성폭행 피해자, 더 넓혀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어떤 범죄로 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피해자들은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주눅들어 있다. 자신들의 두려움을 누군가에게 말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일을 당한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다 내가 못난 탓일까?" 참 이상한 일이다. 왜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아니라 당한 사람이 움츠러들고 자기 비하를 해야 하는 걸까.

물론 자신들이 당했던 피해를 당당히 밝히고 세상으로 나온 사람들이 있다. 미투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난 미투운동을 접하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그 용기를 지지했다. 하지만 '왜 진작 밝히지 않고 이제서?' 라는 의문을 표했던 뉴스 댓글을 보고 '그러게?' 하며 반문했던 적이 있다. 바보같이. 그들이 숨어 지내게 만든 것이 나 스스로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구경꾼이 되어 2차 가해자가 된지도 모르고.

유튜브 TV창비 채널에 최진영 작가의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 중에 2차 가해의 말을 옮겨 적는 일이 힘들지 않았나? 하는 질문에 최진영 '어 내가 이런 말을 어떻게 알고 있지?' 라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아차싶었다. 그러게, 나는 왜 피해자를 질타하는 말을 알고 있을까. '네가 바보니까 사기를 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밤 늦은 시간에 돌아다녀서.' 왜. 왜. 왜.

《이제야 언니에게》로 하여금, 주인공 '이제야'의 이야기로 하여금, 이제서야 이 세상의 모든 제야들을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뜻깊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제야들이 마음 한 구석 덜어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살아가 주길.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 P9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 P32

깡패처럼 때리고 나쁜 짓하면 친한 게 아니지. 친하면 안 그러지.
- P46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 P51

찢을 수 없다. 찢으면 안 된다. 찢어버리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중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보다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보다 중요하다.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러니 다음이 있다. 내게도 다음이 있을 것이다.
- P84

내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내 입장이 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나와 같은 일을 자기들은 겪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면 다음 삶으로 넘어갈 길이 보일까.
- P85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다. 제니를 지키고 싶었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 P109

제야는 어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 P125

총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야는 생각했다. 가스총 말고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 실패하지 않고 단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
- P147

진짜 어른이 되자. 어른이 되어보자. 그런 생각 했어. / 이모는 제야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말했다. / 어른으로서 미안해, 제아야. 정말 미안해.
- P155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 P161

나는 절대 이모에게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모에게는 늘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모도 웃게 할 것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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