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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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읽었습니다. 테드 창 작가의 <숨>.

발간되었을 때 부터 여러 SNS에서 화제였고, 아직까지 베스트 셀러에 올라와 있어서 무척이나 궁금했어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후 17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라고 하는데, 저에게는 첫 테드 창 소설입니다. SF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 열광을 받고 있던데, SF세계를 모두 알기에는 저는 아직 멀었나봐요.


<숨>은 총 9편의 중, 단편 소설을 묶어 둔 소설집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우리가 해야 할 일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거대한 침묵

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입니다. 나의 과거와 미래로 갈 수 있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많은 부를 얻었으며 어떤 이는 20년 후의 자신의 재산을 빼앗기도 합니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푸와드는 미래가 아닌 자신의 아내가 죽은 20년 전으로 가고자 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안다는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 현재를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걸까.

표제작인 '숨'은 9편의 글 중에서 가장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9편의 장품들 중 가장 과학적인 내용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기 해부를 통해 생명의 원천이 어디에서 흘러 오는지 인체를 따라 여행을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어쩐지 엄청난 생명공학의 세상! 사실 내용을 잘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인체는 신비해!

가장 인상 깊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데이터 어스라는 디지털 세계가 존재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디지언트'라는 디지털 세계에서 생성되는 유기체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애완동물로 판매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무척 빠르게 흘러갑니다.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은 디지언트에게 행동 훈련을 하고, 말을 가르치고, 이를 뛰어넘어 각종 지식을 가르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숙제'를 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디지털 세계에서 존재하는 디지언트들은 스스로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자신들이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데이터 어스는 점점 새롭게 등장하는 발전된 디지털 세계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 때 까지 애정을 듬뿍 준 자신들의 디지언트를 포기 못하고 종료, 삭제 하지 못하는 소수의 오너들을 둘러싼 현실적인 걱정과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깊은 문제의 수렁으로 빠지는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2차원과 3차원의 경계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화면 속에 있는 존재가 실제하는지 아닌지 조차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실제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놓지 않고 디지언트들을 지키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디지언트를 종료시키고 두번 다시 재가동 시키지 않는 그저 프로그램의 하나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미래에는 이런 세상도 오겠지, 싶은 현실성 많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아직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현실 속에서도 동물들은 그저 물건 취급하는 뉴스기사가 여기저기 들려 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분노 속에서도 쉽게 동물을 유기하고 살해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가상 애완동물이 등장한다는 것. 이런 세상에서는 아직 그 아이들을 놀잇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더욱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그리고 많이 발전되고 성장된 과학 속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룬 이야기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미래에 정말 이런 기술도 등장할 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도요.

그저 재미로만 읽는 SF소설이 아닌,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많은 논점을 던지는 이야기들이라 기분 좋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머리 터지도록 생각해 보기도 했고요.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에 대한 의문을 많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그런 독자를 위해 창작노트를 실어 둔 걸까요. 이어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읽고 나니 책 표지 디자인이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몽환적이고 어둡고 무언가 우주의 무한함을 담고 있는 느낌이네요.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 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 P56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 P87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 P94

혹시 동물 아바타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디지언트를 실제와는 다른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 것일까. 디지언트는 고전적인 로봇이 나닌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아니라는 애나의 말은 물론 옳다. 어느 쪽 비유가 더 정확한지 누가 확언할 수 있단 말인가?
- P110

의식을 가진 존재들을 마치 장난감처럼 다루는 일이 너무 일반화되어 있다.
- P121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승화된 것이라는 식의 주장. 이런 고정관념은 정말 넌더리가 난다.
- P141

우리의 멸종은 단지 한 무리의 새들의 멸종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의 언어와 의식과 전통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 목소리가 소거되는 것이다.
- P342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습니다. "만약 신이 우리에 대해 아무런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요?"
- P382

언제나 제가, 당신의 의지와 저를 만든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해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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