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절판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133쪽

진린에게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는 날, 물결 높은 바다에서 적탄에 쓰러지는 내 죽음의 환영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환영을 떨처냈다. 날은 무더웠다. 진린은 군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마구 마시고 마구 지껄였다. 진린의 머리 뒤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내 죽음의 환영은 노을 속에서 어른거렸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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