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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공관복음서 전승사
루돌프 불트만 / 대한기독교서회 / 197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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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만 해도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로 폄하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개신교 신학생들이나 대학원생, 목사들을 보면 철학이 단순히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경향은 취향도 아니고 앎에서 오는 방향이 아닌 대중을 따라 휩쓸리는 성향을 말한다. 신학은 철학의 논리구조를 가지고 신의 존재 규정하려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영향 아래 성장했다. 플라톤의 존재론을 이어 받아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할 때 마니교 열성신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날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에 감복했다. 그 이유는 암브로시우스의 탄탄한 수사학 덕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초기 기독교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철학이 가진 논리구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살았던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의 도서관이 존재한 곳이었다. 모든 인문학의 시작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이단을 반박하고자 교부신학의 큰 뼈대를 세우는 데 그게 바로 삼위일체론이었다. 마르키시온의 주장은 굉장히 일 리 있는 말이었다. 새로운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구약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상식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인간성은 당시만 해도 주류 이야기였다. 예수가 완벽하게 그리스도가 된 것은 밀라노 칙령이 있은 후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인해 당시 예수에 대한 기록들은 분서갱유 당한 것이다. 이를 반박해서 콥트어로 쓰여진 도마복음의 발견은 독일 신학계, 특히 양식사학비평에서는 아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초기 이단이라고 억울하게 찍힌 마르키시온 집사는 전형적인 네리우스파였고 예수의 신성은 당시 상식으로는 틀린 거였다. 예수의 직계 제자들의 기록물에서는 그는 사람이었음을 명확히 했으며 바울이 예수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학으로 그리스도로 만들어 모세오경을 버리고 간 디아스포라들을 전도한 것이다. 그 구심점으로 예수가 당첨이 된 것이다.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막에 로마군인들이 들어가 촛대며 금잔이며 다 들고 나오고 때려부수는 것을 올리브산 뒤에 숨어서 보던 유대인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생각해봐라. 분명 다 죽어야 하는데 아무도 죽지 않고 성막이 무너지는 것을 봤으니 자신들의 신앙까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된 자가 바로 예수다라고 전도하고 다닌 것이다. 그런데 다윗왕처럼 강력한 군주여야 하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지도장여야 하는데 힘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만 것이다. 그러니 독립운동가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한 민중들에게 예수를 영적으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유대인전통에서 바울 또한 멀어진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않는 타당하고 명백한 이유다. 그러니 장사꾼이었고 제법 돈도 많고 배움이 깊은 마르키시온이 바울의 제자집단에게 모함으로 이단의 괴수가 돼 버린 것이다. 이단이라는 명칭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게 될 때 지칭할 수 있다. 그 기준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네오플라토니즘의 일자 정신 물질이라는 일자 유출설로 삼위일체의 큰 폼을 완성시킨 것이다. 철저하게 이데아 이론이 바울에게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드러나게 된다. 11-12세기가 돼야 아카데미아에서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이 아랍에서 살아나고 있었고 중세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다시금 부상하게 된다. 그 철학을 가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리적으로 기록할 수 없는 대작들을 만들어내는데, 신존재 증명을 아주 치밀하게 쓰다가만 신학대전이 그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존재 증명 끝났다. 어떤 신존재 증명의 이론이든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주에 포함될 뿐이다. 이렇듯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부터가 플라톤에 기대어 있으며 그 신학의 양대산맥 역시 전부 헬라스 철학 기반에 있다. 헬라스 철학이 없으면 바울의 예수 해석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불트만은 신약성서에 나온 예수의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분석해나간다. 성서비평이 이루어진 것이다. 완전무결한 경전이 철학적 방법론으로 해체되는 아름다운 순간인 것이다. 덕지덕지붙은 흙더미에서 예수의 어록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 중에 공관복음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어떤 자료(Q) 가 가설로 나오게 됐으며 모두가 마가복음과 함께 기초로 쓰여진 것도 밝혀냈다. 양식사학의 쾌거 아닐 수 없다. 니체의 신죽음 이후 불트만을 위시한 독일 신학계는 18-19세기 동안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Q자료의 존재를 밝혀냈다. 그 가설의 확답을 준 것이 쿰란문서와 나그 함마디(1945년 발굴) 문서였던 거다. 이로서 바울의 예수와 역사적인 예수가 나뉘게 되었다. 오랫동안 예수에게 덧입혀진 헬라스 철학의 청년이 아니라 갈릴레아 순수한 청년, 해방 운동과 종교적인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인간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초가 되는 것이 이 책인데, 아쉽게도 동시대의 친구이자 둘 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으로 자유주의 신학자임에도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자로 국내에 알려져서 번역본이 굉장히 많고 또 의도적인 번역도 굉장히 많다. 칼 바르트는 개혁주의 신학자가 절대로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유주의 신학자다. 카톨릭의 칼 라너와 마르세유가 있었다면 개신교에는 불트만과 바르트 그리고 후대의 몰트만이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로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을 테고 그의 제자격인 헤르만 바빙크와 판넨베르크가 자릴 잡고 있는 거다. 소위 교부철학(아우구스티누스)의 큰맥을 같이 하는 조직신학(교의학)인 것이다. 어쨌든 불트만의 공관복음사의 해체는 맹목적인 신앙관에서 예수를 한 인간으로 해방시키고 기독교가 나아갈 길을 이미 제시했다. 그것도 바르트를 통해. 우리나라에는 유명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 안병무, 문동환 선생님의 사회운동신학으로, 소위 민중신학으로 소개되고는 했다. 안병무 선생님의 갈릴래아 예수나 문동환 선생님의 예수냐, 바울이냐는 전부 루돌프 불트만의 영향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제자인 허혁 선생님의 번역과 열정이 아니었다면 불트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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