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문학의 걸작이랑 칭해지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자란 작품이다. 우리에겐 주홍글씨라는 제목이 더 친숙하고 내게도 그러한데 이는 오역에 가깝고 '글자'가 원문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한다. 논란은 있겠지만 글씨는 모양새를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알파벳은 글자인 만큼 주홍글자가 내 생각에도 좀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제목 자체가 가진 상징성이 해당 작품에 가장 핵심되는 것이고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원전에 가장 적합한 번역을 가릴 필요성이 클 것 같다.
참고
해당 서적의 스토리는유명세에 비해서는 그닥 복잡하지 않다. 큰 흐름은 17세기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 마녀재판이 횡행하던 시절 지역사회에 젊고 똑똑하며 명망 있는 옥스퍼드대 출신 딤즈데일 목사가 있었는데, 남편을 두고 먼저 보스톤으로 이주해 온 유부녀 헤스터와 나날이 깊은 정을 나누고, 급기야 여주인공은 사생아인 딸 펄을 낳는다는 것이 사건의 시작이다. 당시 그녀는 나이차가 많이 지는 의사 남편인 칠링워스와 연락이 끊긴지 이년여가 넘은 상황이었으며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여겼다.
헤스터는 끝까지 목사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 혼자 불륜의 대가로 간통의 영어 앞글자인 주홍색 알파벳 A를 가슴에 단채 살아가게 된다. 이후 보스톤으로 오는 과정에서 난파와 인디언 사건으로 고초를 겪느라 늦게 모습을 나타낸 남편 로저 칠링워스는 일련의 사건의 충격을 받는다. 남편은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란 사실을 알게 된 후 의도적으로 목사에게 접근하여 복수를 꿈꾼다. 와중에 양심에 가책을 느낀 목사는 시름시름 앓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아이의 아빠임을 밝히고 죽음을 맞이한다.
뭔가 권성징악이라는 전형적인 전개를 가진 교훈적 고전서였다면 당시 분위기상 도덕적 종교적 죄인들인 헤스터와 목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응징당한다는 내용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호손은 인물들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으며 여기에 고전으로 칭송받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금기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금기를 어긴 인물들이 어떠한 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지, 그 이후의 사정까지를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종교 이전이나 이후에 문제로 인간 스스로의 양심과 개인적인 구원의 모습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
전반적인 플롯이 지금의 시선으로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종교적 지배력이 강한 사회 특성상 목사가 간통을 저질렀다는 소재는 상당히 도발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출간시 이러한 연유로 비평가들에게선 찬사를, 도덕주의자들에게선 엄청난 질타를 받았었다 한다. 더욱이 당시 서구사회 분위기는 여성의 지위가 지금과 같지 않아 상대적으로 낮았으데 소설 내에서 남성을 부정적인 위치에, 여성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위치에 두고 그려 비판론에 힘을 싣는데 한몫 했을 것이다.
남성이자 목회자인 딤스데일은 자신이 같이 저지른 죄임에도 불구, 사랑하는 연인이 형을 받았지만 자신은 함구하는 비겁한 남성으로, 사건 이후에도 주민들에게 종교를 설파하는 (비록 마음의 병으로 점차 쇠약해지지만) 위선적인 종교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와 대조적으로 여성인 헤스터는 딸인 펄을 홀로 키우며 자신에게 마냥 부정적이고 냉대하는 세상을 용기 있게 헤쳐나가는 여성으로 묘사한다.
더불어 그의 남편인 칠링워드는 지성인인 동시에 차가운 피를 가진 냉혈한으로 사람의 딤즈데일의 영혼을 갉아 먹는 악마처럼 활동한다. 중심 인물인 두 남자 모두 청교도의 특색 중에 하나인 남성 우월주의에 따랐을 때 좀 더 괜찮은 처세를 보여줘야 할 것만 같은데 두 사람 모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고 여주인공만이 긍정적인방향으로 나간다는 점이 인상깊다. 더군다나 친구 없이 자유분방하게 키운 펄도 여자아이다.
펄은 둘 사이의 죄를 뜻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는 헤스터를 다시 사회로 돌아로 돌아와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원동력이자 매개체가 되어준다. 딸아이는 타락과 죄의 근원이지만 구원자이기도 한 것. 아이를 입고 먹이는 것을 제외하곤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이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한 선행은 알파벳 A가 간통에서 천사와 능력을 의미하는 글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01장 감옥 문
02장 광장 03장 확인 04장 대면 05장 삯바느질하는 헤스터 06장 펄 07장 총독 저택의 거실 08장 꼬마 요정과 목사 09장 의사 10장 의사와 환자 11장 마음의 심연 12장 목사의 철야 수행 13장 헤스터의 다른 시각 14장 헤스터와 의사 15장 헤스터와 펄 16장 숲 속 산책 17장 목사와 신자 18장 넘쳐흐르는 햇빛 19장 시냇가의 아이 20장 미로를 헤매는 목사 21장 뉴잉글랜드의 축일 22장 행렬 23장 드러난 주홍 글자 24장 결말 |
호손이 종교를 마냥 비판하고자 만든 작품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언제든 부도덕하게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바탕에 두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 하에서라면 굳이 간통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선을 넘을 준비가 된 인간의 나약한 본성과 이를 극복하는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완전성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재평가 해야함 말하고 청교도의 도덕적 완벽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
청교도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익한 강령들을 갖췄다. 모든 직업은 귀천 없이 신성하며 검약을 강조하고 향락을 배격하는 등 건강하고 건전하며 발전적인, 그리고 안정적인 사회가 되도록 일조하는 다양한 기조가 그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문젠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고 이를 과신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고려치 아니한채 심히 억압적이었다.
심지어 즐거움과 재미를 주는 음악이나 소설까지도 금하였다. 성실과 근면도 좋지만 감정과 본능을 방출하여 금욕생활에 다소간 활력이 될만한 출구가 될 수 있는 것들조차 막아버리는 것은 문학작품을 집필하는 호손의 눈에는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과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좀 더 드라마틱한 구성을 위해 선악과를 외관상 흠잡을 것 없는 엘리트 목사 딤즈데일에 들려놓고 잠시나마 감정과 본성에 충실한 날 것의 인간으로 묘사한 것.
그리고 학자인 칠링워드는 날카롭고 이성적인 계몽주의 끝날에 세워놓고 용서하지 않고 자기 원칙을 관철하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녹여낸 인물로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헤스터다. 본능에 충실하여 저지른 죄였지만 이성의 힘과 의지로 주변을 살피며 스스로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베푼다. 종교이야기 같지만 실상 아주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를 성찰하게 만드는 이야기인 것이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도덕적이고 철저하기 원리원칙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리는 크든 작든 어떤 명목으로든 모두 죄인이다. 다만 우리 개개인은 죄를 저지른 이후에 그 죄에 대해서 반성하고 밑거름 삼아 어떻게 미래를 가꾸어 나가는지로 다시 재평가 받고 과거에 아로새겨진 흔적 의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작가는 목사를 통해 종교인의 모순을 보여준 것도 있겠지만 절제와 집요함을 갖춘 칠링워드를 함께 각 캐릭터를 본성과 이성의 양극단에 놓고 이후 죽음으로 둘을 소거함으로써 양자를 절충하여 조화시킨 헤스터를 부각시킨 뒤 그녀마저 죽고 이후에 남겨진 펄로서 자신이 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점을 집약시킨 것이다. 재미난 점이 헤스터가 죽어서 전남편이 아니라 목사였던 사랑한 남자 곁에 묻힌 것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로맨스 소설을 집필하고자 한 의도도 있었겠지만 인간 본연의 감성에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작가의 심정을 투영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신에게 죄의 구원을 비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벌을 받는 이후에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하는지를 그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무엇이 죄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죄인지
돌아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누구나 잠재적으로 죄인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과 3자의 입장에서 죄를 묻고 벌을 주더라도 험한 과정을 거쳐서 제자리를 찾는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란 점을 다시금 생각했다.
나는 그저 생각한다. 종교적인 측면만 아니라면 사실 구원이라기 보다는 회복이란 단어를 쓰고싶다고. 이성과 감성이 조화되어 균형잡힌 이상적 인간향으로 회귀하는 내용의 책이라고.
* 저작권을 위해 일부 일미지를 흐리게 처리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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