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인칭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p.137)

너는 공감과 반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인간의 마음에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들이 나란히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너는 그간 읽은 책에 화가 난다. 단 한 권도 이런 것에는 대비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엉뚱한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엉뚱한 방식으로 읽었거나. (p.237)

그녀의 수치가 있다, 이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수치가 있다, 이것은 가끔 자존심으로 나타나고, 가끔 고상한 현실주의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대개는, 그냥 그 자체로 - 그저 수치로 나타난다. (p.240)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 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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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남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상에 하지 못할 모험이 없고, 원하지 못할 대상이 없으며, 이루지 못할 꿈이 없다. 일단 다 해버린 다음에 근사한 말로 경험을 치장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며 반성하면 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고 원망하기 보다 사고 치고 후회하는 게 나은 세계,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세계를 백인 남자들이 써낸 무수한 소설들에서 발견했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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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p.17)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p.40)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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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 애들이 부러웠다. 그건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끔 신자들을 부러워하는 심리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1초도 빠짐없이 나를 주시하고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는 신이 있으면 사는 일도 한결 든든하지 않을까.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상관없다. 그걸 믿으면 얼마나 위안이 되겠나. 그가 실제로 그걸 믿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는 눈동자 같은 신의 존재를 느끼며 힘을 내어 하루하루 살아갈 테니 말이다. (p.46)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p.82)

나 자신을 평가하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이 일러 준 나의 모습을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특성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삶이 나의 기질과 어울리는지. 사람들의 시선과 모르는 사람들의 존경, 가상의 기대와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 살게 될까.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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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는 모르는 채로. (p.63)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뒤에 그 말은 사람이나 인격, 성격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p.158)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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